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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내 말 좀 믿어줘

<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

by 햇빛 윤

나는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거실에 펼쳐진

사채 내역 종이들 틈에 앉았다.


동생에게 협박을 퍼붓는 수많은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입금하고 그 내역을 정리했다.


금대리, 광대리, 최비서, 김마담..

이름만 들어도 웃겨야 하는데,

내겐 공포와 절망의 단어였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눈덩이 같은 이자를 요구하며

매일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그 돈을 내가 대신 입금해 줬다.


엄마는 동생을 믿지 못해

다른 지역에 있는 동생에게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오후가 돼서야 긴장감이 풀려

하루의 총 입금 내역을 엄마에게 보고를 했다.


금액 정리 후 엄마의 질문은 늘 똑같았다.

"얼마 남았대..?"


동생은 처음에 금액이 2~3천만 원 정도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엄마와 아빠도 믿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 만에 7천만 원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기분이었다.

정말 내가 핸드폰 버튼 몇 번만 누르면

수천만 원이 사라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동생의 말은 빙산의 일각뿐이었다는걸.

동생은 매일 달라지는 금액을 말하며

매일 달라지는 핑계를 댔다.


“이게 마지막이야. 진짜야.”

“기억이 잘 안 나. 내가 정신이 없었어.”


나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었다.


안방에 누워 있는 엄마와 아빠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동생한테 직접 가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당연히 부모가 먼저 나서줄 줄 알았다.

“그래, 당장 가자.”

이런 대답을 기대했다.

아니, 부모라면 당연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동생한테 가면 뭐해.”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 눈앞에 있는 존재들이 정말 부모가 맞나 싶었다.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두 사람의 표정은,

그 순간 껍데기뿐인 부모 같았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방임회피로 더 큰 문제를 만든 이 가족을,

이번만큼은 내가 이끌어야 했다.


만약 이대로 손을 놓아버리고

내가 결혼해 이 집을 떠나버린다면,

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엄마와 아빠를 설득한 끝에 동생을 찾아갔다.

동생의 자취방 문을 열자,

그곳에는 여자친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순간부터 불안했다.


동생이 또 도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서 차를 대고 잠복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나.

마치 영화 속 형사들처럼 몸을 낮추고 숨어 있었다.


몇 달 만에 가족이 함께 만나기 위해 ‘잠복’이라니,

정상적인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퇴근 시간, 동생이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보고 귀신을 본 듯 놀랐다.

“뭐야, 왜 여기 있어!”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무언가 눈동자가 흔들리는 동생의 불안함이 느껴졌다.


나는 오래전부터 느꼈었다.

동생의 눈빛, 말투의 미세한 떨림에서 거짓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동생은 차를 회사에 두고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며

아빠 차를 함께 타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아빠는 그 길에 바로 횟집으로 향하자고 했다.


“밖에서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자.”


나는 처음에 엄마와 아빠가 동생을 보니

안도감이 들어서 그런 줄 알았다.

나도 몇 달 새 야윈 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동생과 아빠는

어느 누가 봐도 행복한 부자의 모습처럼

술을 마셨고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방금 내가 생각했던 가족을 위하는 마음이 바로 산산조각 났다.


여자친구랑 결혼시켜야겠다.”

“얘라면 괜찮아.”

"여자 친구 여기로 부를래?"


나는 방금 먹은 음식이 역류할 것처럼 구역질이 났다.

나는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걔를 왜 불러? 우리가 여기 왜 왔는데?”


내 말 한마디에

화목해 보이던 저녁 식사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동생 자취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이 났다.

아니, 매 순간마다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자가 늘어나고 있겠지?

금액이 대체 얼마일까?'

이 말을 되새기면서

동생 자취방에 도착하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건 ‘차 담보 대출’ 명함이었다.


순간, 동생이 차를 회사에 두고 다닌다는 말이 떠올랐다.


“얘 차 판 거 같아.”

나는 동생이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에

명함을 들고 엄마와 아빠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빠는 술 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 그럴 리가.”


나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토록 “사채는 절대 쓰면 안 된다”던 사람이

막상 현실이 닥치자 술에 취해 도망치는 모습이라니

아빠에게 너무 실망스러웠다.


아빠도 똑같은 '회피 주의자'였다.


다음 날, 더 갚을 돈이 있냐는 엄마와 아빠의 질문에

동생은 더 이상 갚을 돈이 없다며

자취방에 여자친구를 불렀다.


좁은 자취방 한가운데, 우리 가족들 틈에서

그 여자애는 귤을 까서 엄마, 아빠에게 건네며 웃고 있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여자애는 분명 동생이 사채에 빠졌다는 사실을 모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히죽거릴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다시 엄마와 아빠에게 말했다.


“동생 핸드폰 기록을 확인해 보자. 차도, 휴대폰도 다 확인해야 해.”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청소를 하고, 식사를 차려줄 뿐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출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변명일 뿐이었다.

애초에 이들은 해결할 마음조차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날,

아빠가 말했다.

“회사에 가서 차나 보고 가자.”


아빠의 저 말은

이제 와서 나의 눈치를 보고

발등에 불똥 떨어지듯 시늉하는 것 같았다.


동생은 자기는 나가기 귀찮다며

같이 나가지 않을 테니

회사 주차장 층수를 알려준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차가 팔렸을 거라 확신했다.

역시나 주차장에 차는 없었다.


그런데 아빠는 마치 무슨 희망이라도 있는 듯

옥상부터 층마다 주차장을 샅샅이 뒤졌다.


"누나야. 한번 만 더 찾아보자."

아빠는 나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아들을 끝까지 믿고 싶은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속에서 불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만약 그 불이 현실이 된다면,

이 회사 건물을 다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이었다.


엄마는 동생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물었다.

“차가 안 보이는데, 여기 맞아?”

그 말투는 초등학생에게 달래듯 하는 목소리였다.


동생은 뻔뻔하고도 태연하게 말했다.

“엄마, 반대편 비춰봐. 저쪽이야.”


나는 휴대폰을 낚아채며 고함쳤다.


“야, 인간 말종 새끼야. 너 지금 무슨 짓 하는 줄 알아?

사채 써서 죽겠다고 난리 쳐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근데 너, 그보다 더 큰 잘못이 뭔지 알아?

우릴 속이고 또 거짓말한 거야, 이 개새끼야!”


동생은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엄마에게도 외쳤다.

“엄마, 이제 그만 좀 착한 척해!! 상황 파악이 안 돼??”


평소 같으면 나를 원망했을 엄마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동생이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미안해. 누나 말이 맞아. 차 팔았어.”

“나 엄마, 아빠 얼굴 못 보겠어.”

“그리고 누나가 무서워.”


나는 울분을 삼켰다.

내 말을 믿어주기만 했어도,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이제 와서 내가 무섭다고?'

동생의 가증스러운 핑계였다.


엄마와 아빠는 동생이 도망칠까 봐

나를 회사 앞에 두고 자취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빠르게 유턴하는 아빠 차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 내 말 좀 믿어줘. 제발.. 제발 좀 제발... 제발!!!!!!!!!!!!!’


<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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