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
퇴원 후, 나는 식사량을 늘리고,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였다.
예전과는 달리 제법 사람처럼, 조금은 제 기능을 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망이 일어났다.
무엇이든 해보고 싶다는 갈망.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에, 무작정 구인·구직 사이트를 켰다.
그리고 그곳에서
‘쇼핑몰 피팅 모델 모집’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
패션과 디자인에도 늘 관심이 많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한 친구와 함께 패션쇼 무대에 선 적도 있었다.
“언젠가 우리도 쇼핑몰을 차리자.”
꿈을 꾸던 그때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픈 몸으로 인해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의
해골 같은 몸매가 되어버린 나에게,
‘그래도 괜찮다, 나도 예쁠 수 있다.’
자신감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옷을 사러 갔을 때, 내 몸을 훑어보던 점원의 싸늘한 말이 떠올랐다.
“맞는 사이즈 없어요.”
그 불친절한 말이 심장을 베고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증명해 보고 싶었다.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에,
남 앞에서 당당히 포즈를 취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있었지만,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한 번 해보지 뭐.’
그 순간만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차올랐다.
그리고 나는 바로 면접을 보러 갔다.
나는 사진 찍기 딱 좋은 몸이라며
높은 경쟁률을 뚫고 면접에 합격이 되었다.
물론 시작은 고통스러웠다.
불안과 공황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기에,
낯선 공간, 칸막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숨이 차고, 식은땀이 났다.
사장님이 챙겨주는 간식을 먹는 것조차 무섭고 불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괜찮아졌다.
모델로 출근하는 버스 창밖 풍경은 예뻐 보였고,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로 꾸며진 에어팟을 귀에 꽂을 때면,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다.
30대의 내가 20대들이 입는 화려하고 난해한 옷들을 걸쳤을 때,
오히려 짜릿함과 해방감을 느꼈다.
사장님이 말했다.
“말라서 포토샵 할 것도 없다.”
모델을 시작하자
내 앙상한 몸을 안타까워하던 지인들이 말했다.
"아이돌 몸매가 딱 저럴 거야."
앙상했던 내 몸을 누군가 ‘예쁘다’고 말해주자,
나는 비로소 나를 예쁘다고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샌님이 건넨 두 번째 청혼을,
나는 이번엔 당연하다는 듯 받아주었다.
엄마의 말은 여전히 날카롭게 날아왔다.
“나도 얼굴만 가리고 너 입는 옷 똑같이 입으면 모델 할 수 있어.”
'역시 나르시시스트'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무시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날 저녁, 나는 저주받은 식탁에 앉아 평소처럼 밥을 먹다 말했다.
“나 오빠랑 결혼하게.”
엄마와 아빠의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이제서야 드디어 가는 거니?”
그들의 반응은 축복이 아니라, 겨우 짐을 덜었다는 듯한 안도 같았다.
예상했던 그림이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기대했나 보다.
죽을 고비를 넘긴 딸이 결혼을 한다는데,
조금은 다르길 바랐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기대는 무너졌다.
그 반응은 또 한 번 나를 깊은 허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동생은 그 사이에도 문제투성이였다.
등록금을 빼돌리고, 졸업시험까지 탈락할 위기에 몰렸지만,
어찌어찌 졸업을 했다.
‘드디어 졸업을 했구나.’
나는 동생이 아닌, 나 자신이 졸업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잊고 있던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남동생이니 당연히 군대는 보냈다.
보통 누나들은 군대 가는 동생을 보내며 눈물을 흘린다지만,
나는 기도했다.
'제발 군대에서라도 개과천선해서 돌아와라.'
내가 응급실에 실려 갈 때만 울던 엄마가,
동생을 군대에 보내면서는 수도꼭지처럼 울었다.
그 눈물은 내겐 이질감이었다.
군 입대 전, 동생은 같은 과 친구의 여자친구와 바람을 피웠다.
수많은 사고를 치던 와중에도 여자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나는 동생보다도, 동생과 얽힌 여자들이 더 불쌍하고 이해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선명히 남는 두 명의 여자애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첫 번째 여자애 이야기다.
동생이 입대 후, 어느 날 대대장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훈련병이 무슨 사고라도 쳤나 싶었다.
하지만 전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동생이 빼앗았던 여자애의 전 남자친구가
군 인터넷 편지 창을 도배한 것이다.
“네 여자친구 네 친한 선배랑 바람났다.”
군대에서 여자 문제는 탈영까지 이어질 수 있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늘 동생이 미웠지만,
동생을 괴롭히는 다른 누군가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동생은 충격으로 군장을 메고 훈련하다
허리를 다쳐, 결국 의가사 제대를 했다.
제대를 한 동생이 술자리에서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걔가 자기 자위하는 영상 찍어서 나한테 보내줬었어.
그래서 영상 친구들한테 뿌린다고 협박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미친놈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여자애도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었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았다.
일이 더 커질까 두려웠다.
여자애가 신고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엄마는 또 아플 것이고, 아빠는 분노로 폭발할 것이다.
결국 내가 직접 나섰다.
여자애를 만나 말했다.
“내가 영상 지워줄게. 대신 내 동생 앞에 다시는 얼씬거리지 마.”
그리고 동생에게는 말했다.
“내가 그년 만나서 싸다귀 때렸다.”
동생은 아직도 내가 의리 넘치는 누나로 믿고 있다.
나를 정의감 넘치는 ‘또라이 누나’로 정의하는 사건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기억 속 나머지 한 명의 여자애.
그녀는 우리 집에서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할 사건의 단역 배우 정도였다.
당연히, 주인공은 나였다.
모델 일을 하며 결혼 준비를 하던
나의 겨우 찾아낸 나의 삶의 무대는
돌이켜볼수록 평범할 수가 없었다.
아니, 평범하지 않은 운명을 타고난 듯했다.
다이너마이트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니 벌써 속이 답답해진다.
<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