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Ⅱ. 기억의 앨범: 지워지지 않는 순간들
난처했던 기억으로 남은 방학 숙제가 있다. 바로 ‘가족사진 붙여오기’였다. 1990년대에는 지금처럼 카메라가 흔치 않았다. 사진 현상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하지만 카메라가 없어도 사진관에 가면 됐다. 사진은 동네 사진관에서 찍으면 될 일이었다.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은 카메라의 부재도, 가족사진의 부재도 아니었다. 바로 아빠였다. 며칠을 제외하고는 일 년 내내 집에서만 생활하는 아빠는, 사진 찍기를 꺼렸고 외출은 더더욱 꺼렸다. 그러니 아빠에게 동네 사진관까지 가서 사진을 찍는 일은, 꺼리는 일에 또 꺼리는 일을 곱한 셈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여름 방학 숙제로 제출할 가족사진을 찾아달라고 했다. 엄마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셋이 찍은 사진 같은 건 없다는 듯했다. 아빠에게 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에 사진관에 가자고 했지만, 아빠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언제 찍으러 가?”라고 물어봐도 “나중에 가자”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빠의 대답은 늘 똑같아서 나중에는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가족사진 숙제는 계속 뒤로 밀려났다. 다른 숙제들이 마무리될 때까지도 말이다. 나는 숙제를 못 끝내면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걱정이 많은 아이였다. 성실한 만큼 작은 일에도 쉽게 불안해지곤 했다. 가족사진 숙제만 손도 못 댄 채 남아 있다는 사실은 나를 괴롭혔다.
어느 날, 분명히 어딘가에는 사진이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앨범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기였을 때 다 같이 찍은 사진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처음엔 보물찾기라도 하는 듯 설렜지만, 앨범이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설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변해갔다.
낡은 앨범은 아빠와 엄마의 젊은 시절로 가득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이었다. 사진 속 아빠는 턱수염이 덥수룩했고,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에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옥탑방이 딸린 옥상 바닥에서 다리를 포개고 앉아 기타를 치는 그 모습은, 지금 서재 안에서 백지와 씨름하는 아빠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순간 우리 가족이 가진 특유의 ‘다름’은 아빠로 인한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개학 전날, 나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왕왕 쏟아냈다. 숙제를 못 해간다는 두려움보다도 더 깊은 불안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 가족에게는 함께 찍은 평범한 가족사진 한 장조차 없을까, 하는.
“그러니까 애가 사진관 가자고 했을 때 좀 가지 그랬어”라며 엄마는 아빠를 핀잔했다. 아빠는 멋쩍어졌는지 “가족사진을 숙제로 내다니, 이상한 학교 같으니”라고 투덜거리며 애먼 학교 탓을 했다. 내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도록 울어대자, 엄마도 나처럼 앨범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엄마가 나선다고 해서 애초에 없던 사진이 갑자기 있을 리가 없었다.
엄마는 마침내 묘안을 내놓았다. 바로 사진을 오려서 붙이는 방법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포토샵 합성인 셈이다. 다만 가위와 풀로 하는 원시적인 편집이었지만. 엄마는 내 얼굴이 또렷하게 나온 사진을 오려내어, 신혼여행 사진 속 엄마와 아빠 옆에 붙였다. 그렇게 ‘가족사진 붙이기’ 방학 숙제는 어딘가 껄끄러운 방식으로 마무리됐다.
시끌벅적한 개학 첫날, 교실에서 친구들이 가족사진을 서로 보여주며 웃을 때, 오직 나만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내 사진을 보여달라고 하면 어쩌나 싶어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피하고 싶었던 순간은 오고야 말았다. 오려 붙인 흔적 앞에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더 싫었다. 차라리 물어라도 봐주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기억은 내 마음에 깊은 구멍을 남겼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색깔의 실로 짜인 듯한 우리 가족만의 근본적인 이질감이라는 구멍. 어느 날 갑자기 그 구멍에 무언가가 돌멩이처럼 툭, 하고 떨어졌다. 그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깊이 박힌 채로 차츰 뿌리를 내려 나갔다. 어린 나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라면서 점점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불안이었다.
그리고 외로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