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가을날의 성묘와 역사,
지리 여행

by 정희

추석을 앞두고 가족 납골당에 다녀왔다. 경기도 연천에 자리한 정주 동산이다. 북녘 고향을 그리워하던 실향민들이 만든 선산이다. 맑고 좋은 가을날, 따가운 햇볕과 뭉게구름이 마치 한여름처럼 떠 있어 기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런데 납골당에 도착해 깜짝 놀랐다. 납골당을 덮은 풀과 칡넝쿨이 너무 무성해 어디가 납골당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겨우 조화를 찾아 위치를 확인하고, 낫도 없이 맨손으로 풀을 정리했다.


올여름 무더위 탓인지 풀이 정말 무서운 속도로 자라 있었다. 문득 전망 GOP에서 근무했던 아들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들은 군대에서 풀과 눈이 정말 무서웠다고 했다. 풀이 너무 무성하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어려워 늘 잘라야 하는데, 풀을 베고, 돌아서면 다시 자라 있었다는 것이다.

눈 또한 쓸어도 쓸어도 계속 내려 눈 치우는 일이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는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머니 납골당을 뒤덮은 풀을 보며 올여름의 높은 기온과 습도가 정글을 만들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호로고루, 역사를 품은 임진강의 요새

성묘를 마치고 근처 고구려 유적지인 호로고루에 들렀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언덕 위, 가슴이 뻥 뚫리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발아래로는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강물은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소용돌이치며 끊임없이 흘렀다.


고구려인들이 외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산성을 보며,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변변한 장비도 없던 시절 이 성을 쌓는 일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상상했다. 마치 행주산성처럼 여성들이 치마폭에 흙과 돌을 날랐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세운 성곽으로, 임진강 북쪽 현무암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성벽을 이루는 거무튀튀한 돌들을 보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다.

제주도에서나 보던 이 돌들이 내륙 깊숙한 연천에 있다니 신기했다. 알고 보니 아주 먼 옛날, 평강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이곳까지 밀려와 굳은 흔적이라고 한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흐르는 임진강을 내려다보았다. 왜 고구려가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이 가파른 절벽은 그 자체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방패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신라가 당나라 대군을 막아내고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니, 발밑의 흙 한 줌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성벽 아래로 펼쳐진 밭들이 유난히 기름져 보였다. 화산 활동이 남긴 비옥한 흙 덕분인지, 연천은 예로부터 콩과 율무가 유명하다. 실제로 주변 식당에서는 지역 특산물인 콩으로 만든 두부 요리를 내놓고, 카페에서는 율무 라떼나 율무 쿠키 같은 독특한 디저트를 팔기도 한다.


호로고루 성벽 위에 서서 임진강을 바라보면, 이곳이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삼국의 역사가 교차한 현장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자연이 만든 절벽과 인간이 쌓아 올린 성벽이 함께 어우러져, 연천은 지금도 역사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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