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by 정희

철 지난 바닷가, 용천을 만나다

여름의 북적임을 걷어낸 철 지난 바닷가는 고요 그 자체였다. 상점들은 드문드문 문을 닫았고, 해변은 오직 바람의 몫이었다. 제주도 북서쪽, 곽지해수욕장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특별한 계획 없이 떠난 여행, 곽지해수욕장에서 올레길 15-B 코스를 따라 서쪽으로 걷기로 했다.


걷다 보니 곳곳에서 용천을 만났다. 땅속에서 힘껏 솟아나는 샘물. 학교 수업에서 제주 사람들이 해안가에 많이 사는 이유를 용천 덕분이라고 설명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제주에 여러 번 왔지만, 이렇게 자주, 이렇게 가까이서 용천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오늘은 유난히 눈에 들어와 시선을 붙잡았다.


제주는 비가 많이 내리는 섬이다. 하지만 제주 토양은 물이 쉽게 스며드는 현무암 풍화토가 대부분이다. 땅속 깊이 스며든 빗물이 지하수가 되어 해안가에 닿으면, 바닷물의 압력에 밀려 다시 밖으로 힘껏 솟아오른다. 그게 바로 용천이다. 예전 제주 여인들은 구덕에 물통을 담아 이 샘물을 길어 날랐을 것이다. 모든 삶의 물줄기는 바다 곁, 용천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검은 돌과 기계화된 농촌

바다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해안가엔 까만 돌이 끝없이 이어진다. 마치 누가 일부러 태워놓은 듯 새까만 돌들. 아스팔트보다도 더 짙은 검은색이다. 그 돌들 사이로 파도가 부서지고, 햇살이 반짝인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15-B 코스의 시작점인 비양도 선착장에 닿았다. 천천히, 쉬엄쉬엄 걷다 보니 오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길 위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로 걷고 있었다. 부부, 친구, 연인, 혼자 걷는 이들. 평일이라 그런지 젊은 사람보다는 중년의 사람들이 많았다. 말없이 걷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삶의 두께만큼 쌓인 각자의 이야기가 느껴졌다.


올레길은 가끔 밭과 마을을 가로지른다. 돌담이 이어진 골목길, 낮은 담 너머로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제주 전통 가옥은 거센 바람을 막아주면서도, 이웃과의 경계를 일부러 허물었다. 따뜻한 기후와 강한 바람,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정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이런 개방성은 지금도 남아 있다. 대문이 없는 집, 열려 있는 정낭, 새시 없이 열린 발코니. 구불구불한 진입로는 공공과 사적인 공간을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물론 강한 바람과 염분 때문에 요즘은 샷시를 다시 다는 집도 많지만, 그 안에서도 제주의 정신적 개방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밭에서는 케일, 당근, 양파, 콜라비 같은 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제주 서쪽과 동쪽 밭은 겨울 채소의 거대한 보고다. 우리가 먹는 당근, 양배추, 무는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나온다. 밭마다 스프링클러가 돌아간다. 기계가 쉴 새 없이 작물에 물을 뿌렸다. 검은 돌담 너머 너른 밭에서는, 이제 기계가 사람을 대신해 일하고 있었다.


드론을 준비하는 농부도 보였다. 이제는 드론으로 농약을 뿌리는 시대다. 하늘을 나는 기계가 밭을 돌보고, 사람은 그걸 조종한다. 농촌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해산물 공장과 바다의 냄새

해변을 걷다 보니 육상 양식장이 나타났다. 물고기를 키우는 공장. 제주 바다는 맑고 깨끗해서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데, 이곳 근처에선 특유의 바다 냄새가 났다. 먹이를 찾아온 갈매기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양식장 안에서는 바닷물이 기계에 의해 들고 나며, 광어, 전복, 도미 같은 고급 어종들이 자란다. 요즘은 사용한 물을 정화해 다시 쓰는 방식도 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양식장에선 먹고 남은 사료 찌꺼기나 배설물이 바다로 흘러나간다. 바다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 어쩌면 영원히 고민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시간의 경계, 중산간

서울로 돌아가는 날. 비행기 시간 전, 잠깐의 여유를 틈타 15-A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이 길은 중산간으로 난 길. 어제 봤던 해안가와는 또 다른 풍경, 평평한 땅이 끝없이 이어진다. 육지에선 보기 힘든 너른 평지다. 걷다 보니 작은 오름이 보였지만, 시간에 쫓겨 오르지 못했다.


예전 제주 사람들은 중산간에서 많이 살지 않았다. 삶의 가장 큰 조건인 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중산간 사람들은 빗물을 받아 썼는데, 그 빗물을 ‘봉천수’라 불렀다. 하늘이 내려준 물이라는 뜻이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멀리 해안가까지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제주 여인들의 고단했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떠나는 길

스프링클러와 봉천수. 두 장면이 머릿속에서 겹친다. 물 한 모금 얻기 위해 허벅을 지고 해안을 오가던 여인들의 삶 위에, 이제는 기계가 물을 뿌리고 작물을 키운다. 제주라는 섬은 그렇게 쉼 없이 변해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3박 4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검은 현무암과 푸른 바다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느리게 걸었기에,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삶을 조금은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제주가 내게 보여준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수많은 시간을 버텨온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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