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벌어, 한가로움을 소비하는 법
매일 매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치열하게 살아오던 나. 가을이 완전히 지나가기 전에, 그냥 제주로 떠났다.
나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삶에 익숙하다. 중·고등학교 교사 시절, 대부분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다섯 시 정시 퇴근을 위해 매분 매초를 전쟁처럼 일했다. 그런 삶의 방식이 오랫동안 몸에 배었다.
퇴직 후 백수가 무슨 시간을 쪼개 쓰냐고들 웃지만,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요즘은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데, 모임에서 매일 내주는 공부량이 만만치 않다. 자칫 늘어지기 쉬운 노년의 삶이지만, 오히려 시간을 아껴가며 공부할 일이 있다는 것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아마 화를 내며 거부했을 것이다. 새로운 공부 외에도 '꼭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기에.
노년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누리는 자유, 그것은 바로 의무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바쁜 일상, 잠시 멈춤
새로운 공부 이외에도 나는 일주일에 다섯 번 운동하고, 가끔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린다. 글은 머릿속에서 충분히 구상이 끝나야 쓸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생각이 머릿속에서 익는다'라고 표현한다. 마치 김치가 익고, 술이 익듯이.
초안은 단숨에 써내지만, 그다음이 늘 고난이다. 문장이 어색하고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수없이 고치고 또 고친다. 발행 후에도 계속 수정하는 탓에, 처음 올린 글과 시간이 지난 후의 글은 제법 달라져 있곤 하다.
이런저런 바쁜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훌쩍 떠났다. 김포공항에서는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 무리를 보았다. 친구와 함께하는 여행에 대한 설렘과 흥분, 그리고 인솔 교사의 고단함이 함께 느껴졌다.
바람의 섬, 제주를 걷다: 오름과 바람이 빚은 풍경
오늘은 제주에서의 첫날, 올레 15-B길을 걸었다. 바람이 거셌지만 차갑지 않아 오히려 기분 좋았다. 제주는 정말 바람 많은 섬이다. 제주는 동중국해와 태평양으로 열려 있어, 주변에 바람을 막아줄 지형지물이 거의 없다. 사방이 트인 섬이라 바람이 아주 거셀 수밖에 없다.
제주에는 한라산을 제외하면 높은 산지가 거의 없고, 대부분 평지이거나 완만한 구릉지뿐이다. 약 360여 개의 기생화산인 오름이 산지 역할을 대신한다. 강한 바람 탓에 식물들은 키를 크게 키우기 어려운 듯하다. 해안가 주변의 식물들은 대부분 옆으로 기는 키 작은 관목들이었다. 꽃들 역시 땅에 붙어 자신을 낮춘 채, 작지만 강인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해안가의 작은 밭에서는 땅콩이 자라는 모습도 보였다. 제주에는 땅콩 국수, 막걸리, 아이스크림 등 땅콩을 활용한 특산물이 많다. 이는 바람이 선물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땅으로 기는 특성 덕분에 땅콩은 강한 바람에도 끄떡없이 잘 견딘다.
시간을 벌어 한가로움을 소비하는 법
올레길을 벗어나 버스를 타고 제주 도심으로 향했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유일하게 정해놓은 일정이 도심에 있는 식당 한 군데 예약이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계획이 없었기에 식당 주변을 둘러보는 도심 투어를 시작했다.
제주 시내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관광지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힙한 카페나 식당들이 숨어 있고, 제주의 생활과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다. 나는 예약 시간까지 시내를 느긋하게 걸어 다녔다. 거리를 목적 없이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살던 나에게 주어진 가장 달콤한 보상이었다.
걸으면서 오래된 주택가나 소품점 앞을 서성였다. 치열하게 시간을 벌어, 이렇게 아낌없이 한가로움을 소비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노년이 되어 누리는 자유이자, 내가 이 제주에 온 이유라는 생각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