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아파트에서 중경삼림을 만나다
젊은 시절, 나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참 좋아했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화양연화》는 몇 번이고 다시 본 작품들이다. 특유의 나른하고 퇴폐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성,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색감, 몽환적인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영화 음악까지 완벽했던 왕가위의 영화는, 홍콩이라는 도시와 엮여 내 청춘의 오랜 로망이 되었다.
첵랍콕 공항, 홍콩의 자비 없는 첫인상
겨울이었지만 춥지 않았고, 축축한 습기가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첵랍콕 공항은 현대적이었으나, 강렬한 습기가 홍콩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홍콩은 민낯을 드러냈다. 건물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빈틈없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해가 비추는 것, 전망은 사치 중의 사치라고 느껴졌다.
이곳에서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어 내는 것' 같았다. 거리는 인파로 넘실거렸고, 귀청이 아플 만큼 시끄러웠다. 특히 신호등의 안내 음성은 귓가를 끊임없이 울려 퍼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좁은 골목을 다녀도 사람이 가득했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경찰이라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버리고 작은 식당을 하는 양조위의 설정이 예전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홍콩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 좁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작은 가게를 갖는다는 것은 곧 부동산을 소유한다는 의미다. 어떤 장사를 해도 손님은 넘쳐날 것이다. 부동산 소유는 곧 부의 상승, 그것이 홍콩이었다.
엄청난 인파 속, 미드레벨에서 찾은 낭만
엄청난 인파에 지쳐 왕가위 감독의 영화 촬영지를 찾아다닐 엄두는 쉽게 나지 않았다. 거리를 걷다가 잠시라도 쉬고 싶었지만, 카페는 항상 만석이었고, 식당에서는 합석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단 한 곳, 《중경삼림》의 배경이었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만은 꼭 보고 싶었다. 왕페이가 일하던 가게를 훔쳐보던 경찰 663(양조위)처럼.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에스컬레이터 시스템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올라가며 홍콩의 좁고 분주한 골목과 상점들을 구경했다. 영화 속 낭만은 거대한 현실의 파도에 희미해졌지만, 그 복잡함 속에서 왕가위가 포착해 낸 절제된 고독과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홍콩의 속도와 금은방의 의미
하지만 그 고독을 음미할 새도 없이, 홍콩은 나를 다시 빠른 속도전으로 내몰았다.
도로에는 영국식 디자인을 이어받은 붉은색 2층 버스가 달리고, 좁은 거리 양옆에는 네온사인 간판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와 낡은 아파트가 공존하며 홍콩의 급속한 발전과 역사적 흔적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쇼핑몰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의 속도였다. 한국보다 훨씬 빨라 놀랐다. 홍콩 사람들에게도 우리 못지않은 ‘빨리빨리’의 속성이 있는 듯했고, 그 치열함이 에스컬레이터의 속도에까지 반영된 것 같았다. 한국이 '심리적인 속도'라면, 홍콩은 생존을 위한 '물리적인 속도' 같았다.
또 하나 눈에 띈 것은 수많은 금은방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는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 금은방이 홍콩에서는 여전히 성황이었다. 국제 금융 중심지이지만 늘 정치적 긴장감이 감도는 홍콩에서, 금은 흔들림 없는 안전 자산으로 선호되는 듯 보였다.
복잡한 도시의 틈, 이주 노동자의 연대
일요일 홍콩의 도심 공원에서 필리핀, 인도네시아 출신 여성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주 6일을 가사노동에 종사하며 단 하루 주어진 휴일에, 그녀들은 돗자리 위에서 고향 음식을 나누며 연대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듯 보였다. 홍콩 사람들은 부동산으로 공간을 점유하지만, 이들은 일요일의 공원이라는 틈새 공간을 점유하며 위로를 얻고 있었다.
홍콩은 영화에서 보았던 몽환의 필름이 아니었다. 치열한 생존과 거대한 인파의 에너지가 넘실대는 극도로 현실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그 압도적인 혼잡함과 속도 속에서, 왕가위는 절제되고 섬세한 인간의 감정을 포착해 냈다. 그가 영화에서 읊조리던 고독과 사랑은, 이 복잡한 도시의 좁은 틈새에 숨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는 낭만을 찾아 이 도시에 왔지만, 결국 이 극렬한 현실 속에서 낭만이 왜, 어떻게 태어났는지 이해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