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홍콩 여행

by 정희

북위 22도의 혹한: 홍콩의 모순을 경험하다

몇 년 전 12월, 크리스마스를 맞아 홍콩 여행을 계획했다. 특별히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세상의 모든 빛을 모아 놓은 듯한 홍콩의 연말이 낭만적일 것이라 기대했다.

첵랍콕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했다. ‘신발 모양의 선물 주머니’ 같은 환영 선물을 받았는데, 나는 다소 의아했지만 딸은 환영받는 느낌이라며 무척 좋아했다.


타이 오 마을, 수많은 인파 속의 합리성

첫 여행지는 란타우 섬 서쪽 끝의 유서 깊은 어촌 마을 타이 오(Tai O)였다. '동양의 베니스'라 불리는 이곳은 물 위에 기둥을 세운 전통 수상 가옥이 상징적이다. 보트 투어를 하며 희귀한 분홍 돌고래를 보려 했으나, 아쉽게도 나는 보지 못했다.


타이 오 관광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을 때, 숨이 막힐 만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어쩌면 평생 내가 본 것보다 더 많은 인파였다. 오늘 안에 홍콩 본섬 숙소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곧,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경험이 시작되었다. 시내버스는 물론 시외, 관광버스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도착하더니, 직원들이 사람들을 계측기로 정확하게 세면서 순서대로 태우기 시작했다. 엄청난 인파가 마치 마법처럼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보고, 나는 홍콩식 합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덕분에 우리는 너무 늦지 않게 무사히 홍콩섬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상 밖의 혹한, 실내보다 따뜻한 바깥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했지만, 문제는 뜻밖의 곳에서 터졌다. 호텔이 너무 추웠다. 북위 22도의 홍콩. 우리나라보다 훨씬 남쪽에 있어 겨울에도 따뜻할 것이라 짐작했지만, 호텔은 예상 밖의 혹한이었다. 홍콩은 아열대 기후라 난방 시설이 보편적이지 않았고, 높은 습도 때문에 체감 온도가 낮아 더 춥게 느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 한다.


한국의 따뜻한 난방에 익숙했던 우리는 밤마다 추위에 떨어야 했고, 가지고 간 옷을 전부 껴입은 채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아침이면 몸 상태는 늘 좋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서면 더울 정도로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호텔 실내에 칼날 같은 추위가 찾아왔다. 지하철역이나 따뜻한 화장실에서 노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할 만큼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빛나는 낮과 인간 기술의 기예

밤의 추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여행을 포기할 수 없어 수많은 명소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추위 탓인지 그 화려한 야경조차 서늘하게 느껴졌다.

홍콩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페리를 타고 마카오로 향했다. 마카오에서는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마카오 역사 지구를 둘러보았고, 화려한 리조트 구경도 했다.


특히 마카오 명물 ‘더 하우스 오브 댄싱 워터’ 공연은 잊을 수 없다. 세계 최대 규모의 수중 무대에서 올림픽 수영장 5개 분량의 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채워졌다. 이 놀라운 기술적 기예(技藝)를 보며, 인간 기술의 한계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카오의 무대 위 물은 기술로 완벽히 통제되었지만, 현실의 홍콩 입국장은 통제 불능의 바다 같았다.


한국인이 참기 어려운 비효율, 홍콩의 밤

마카오 관광을 마치고 가장 늦은 페리를 타고 홍콩섬으로 돌아왔다. 마카오 출국은 쉬웠으나, 홍콩 입국 심사에서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홍콩 거주자 창구는 여러 개 열려 있었지만, 정작 외국인 관광객 창구는 단 하나만 열려 있었다.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들의 불만이 가장 컸다. 역시 우리는 뼛속까지 '빨리빨리'의 효율을 갈망하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우리나라 공항의 시스템에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일부 사람들은 지인, 즉 '관시(關係)'를 통해 빨리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결국 자정이 넘어서야 간신히 홍콩에 입국할 수 있었다.


타이 오 마을에서 경험했던 합리적인 버스 수송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대비야말로 홍콩이라는 도시가 가진 가장 흥미로운 얼굴이었을 것이다.


짐 보따리처럼 남은 기억들

타이 오 마을의 합리적 질서와 입국 심사대의 느슨한 비효율. 따뜻한 낮과 밤의 매서운 추위.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홍콩의 상반된 풍경들을 차례로 마주했다.

예상치 못한 추위와 불편함은 오히려 여행의 순간들을 더욱 깊게 각인시켰다. 다음번 홍콩 방문 때는 난방이 잘 되는 숙소를 고르겠지만, 그때의 차가운 공기는 오래도록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홍콩은 우리에게 단지 화려함만을 보여준 도시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마주한 모순과 대비는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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