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 스페인 대정전의 추억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 레온

by 정한결

León day 1

6명이 함께 뜻깊은 저녁을 보내고 여정을 시작했다.

또다시 대도시 León(레온)으로 가는 날이었다.

JH, SY, 나 셋이 같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초반부터 내 속도가 처지기 시작했다.

결국 둘을 먼저 보내고 나는 나만의 속도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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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대도시 입성날이 나에겐 고비였다.

피로가 누적되서인지, 대도시라는 생각에 마음이 흐물흐물해져서인지, 둘 다인지 몰라도 늘 대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난이도가 높지 않아도 힘이 들고 축축 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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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에서 유명한 츄러스 가게를 가기로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양한 종류의 빵을 파는 가게를 보고 자연스럽게 입장해 버렸다.

1.9유로의 거대한 크림빵에 결심도 쉽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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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반쯤 레온 외곽부에 도착했다.

이것도 대도시 입성의 문제이다.

다른 까미노는 목적지 직전까지 자연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눈이 편하다면, 대도시는 외곽지역까지 거주지 느낌이라 순례길을 걷는다기 보다 그냥 한껏 지쳐서 예쁘지 않은 길을 걷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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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시티 중앙부에 도착하자마자 유명한 츄러스 가게로 갔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JH와 SY, 그리고 같이 연박을 하기로 한 HY님까지 함께 츄러스를 먹고, 만족스러워서 바로 한번 더 시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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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선 휘황찬란한 식당에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 순례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식당 Umi가 있었고, 레온 입성 날 점심은 그걸로 정해졌다.

카레에 롤에 덮밥에 교자에... 비싼 가격에도 정신 못 차리고 이것저것 주문해 먹었다.

매일 긴축정책을 해야 한다 어쩌고 하지만 시티에 입성하면 그 결심이 모두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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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 체크인 후엔 또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아일랜드에 살 때 냄비밥을 종종 해 먹었어서 내가 밥을 담당했는데, 나 자신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밥이 완성됐다.

여기에 중국마트에서 산 마라소스, 우삼겹, 떡, 목이버섯을 넣고 만든 마라떡볶이.

생각보다 음식 양이 너무 많아져서 레온의 다른 알베르게에 있던 JS님을 불러 저녁을 5명이 같이 먹었다.


HY님이 마라떡볶이를 만들었는데 넷 다 입을 모아 까미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이거라고 말했다.

이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맛있는 마라떡볶이는 먹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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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간을 넘어가는 까미노에서 각자가 느끼는 것을 공유했다.

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인데 엄청나게 깊은 감정을 나누고, 또 서로에게 공감했다.


JS님이 간 후에도 남은 에어비앤비 메이트 넷이서 새벽 3시까지 떠들었다.

이 바람에 HY님마저 계획에 없던 레온 일정을 하루 추가했다.


León day 2

늦잠을 자고 일어난 둘째 날.

나는 이 날 Candy, Kim과 함께 레온 대성당을 가기로 했었다.

오후 1시쯤 만나기로 해서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데, 갑자기 침실 불이 꺼졌다.

사실 유럽에서 이 정도 정전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냥 우리 숙소 건물만 잠시 정전이겠거니 했다.

근데 만나기로 한 Candy와 연락하다 보니 도시 전체가 정전이라고 했다.

어찌 됐건 1시에 만나기로 해서 나는 시티로 나갔다. 서서히 데이터도 안 터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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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만난 Kim이 이 정전이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3국의 정전이라고 알려줬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훨씬 심각했다.


일단 카페에서 뭘 좀 먹자고 하고 케이크를 주문해 먹었다.

카드기가 안 돼 계산은 물론 현금으로 했다.

성당도 정전의 여파로 문을 열지 않았고, 멈춰버린 도시에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각자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4시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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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돌아와 할 일 없이 잠만 잤다.

성당도 오늘 내내 못 보는 것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4시부터 입장 가능했다.

쨍쨍한 날씨에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하게 빛났다.

'정전이 된 날에 해가 쨍쨍하다는 게 얼마나 축복이니'라는 Kim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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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으로 모든 게 멈춘 시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는 카오스 그 자체였다고 하던데, 레온은 카오스가 올 정도의 대도시는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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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업을 계속하던 레스토랑이 있었다.

거기도 다양한 메뉴는 못 만들지만, 샐러드 같은 음식은 여전히 제공하고 있었다.

Kim, Candy,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그 레스토랑에 갔다.


나는 전날부터 불닭짜장이 너무 먹고 싶었고, 이 날 저녁으로 먹기로 약속도 한 상태였다.

언제 정전이 끝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오늘 내로 해결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JH, SY, HY을 만나 다시 돌아간 숙소.

하루 종일 이상할 정도로 잠이 왔고 돌아가서 또 잤다.

그렇게 자던 중, 정말 기적처럼 8시에 정전이 복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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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되자마자 시티에서 열려있던 슈퍼를 가 치킨볼을 사 왔다.

그리고 벼르고 벼르던 불닭 짜파게티를 끓였다.

어제 남은 목이버섯까지 한가득 넣고, 이렇게 탈 많던 시티에서의 대정전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나의 순례길엔 에피소드 하나가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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