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 레온
León day 1
6명이 함께 뜻깊은 저녁을 보내고 여정을 시작했다.
또다시 대도시 León(레온)으로 가는 날이었다.
JH, SY, 나 셋이 같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초반부터 내 속도가 처지기 시작했다.
결국 둘을 먼저 보내고 나는 나만의 속도로 걸었다.
매번 대도시 입성날이 나에겐 고비였다.
피로가 누적되서인지, 대도시라는 생각에 마음이 흐물흐물해져서인지, 둘 다인지 몰라도 늘 대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난이도가 높지 않아도 힘이 들고 축축 처졌다.
레온에서 유명한 츄러스 가게를 가기로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양한 종류의 빵을 파는 가게를 보고 자연스럽게 입장해 버렸다.
1.9유로의 거대한 크림빵에 결심도 쉽게 무너졌다.
오전 10시 반쯤 레온 외곽부에 도착했다.
이것도 대도시 입성의 문제이다.
다른 까미노는 목적지 직전까지 자연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눈이 편하다면, 대도시는 외곽지역까지 거주지 느낌이라 순례길을 걷는다기 보다 그냥 한껏 지쳐서 예쁘지 않은 길을 걷는 느낌이다.
레온 시티 중앙부에 도착하자마자 유명한 츄러스 가게로 갔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JH와 SY, 그리고 같이 연박을 하기로 한 HY님까지 함께 츄러스를 먹고, 만족스러워서 바로 한번 더 시켜 먹었다.
대도시에선 휘황찬란한 식당에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 순례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식당 Umi가 있었고, 레온 입성 날 점심은 그걸로 정해졌다.
카레에 롤에 덮밥에 교자에... 비싼 가격에도 정신 못 차리고 이것저것 주문해 먹었다.
매일 긴축정책을 해야 한다 어쩌고 하지만 시티에 입성하면 그 결심이 모두 무용지물이다.
에어비앤비 체크인 후엔 또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아일랜드에 살 때 냄비밥을 종종 해 먹었어서 내가 밥을 담당했는데, 나 자신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밥이 완성됐다.
여기에 중국마트에서 산 마라소스, 우삼겹, 떡, 목이버섯을 넣고 만든 마라떡볶이.
생각보다 음식 양이 너무 많아져서 레온의 다른 알베르게에 있던 JS님을 불러 저녁을 5명이 같이 먹었다.
HY님이 마라떡볶이를 만들었는데 넷 다 입을 모아 까미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이거라고 말했다.
이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맛있는 마라떡볶이는 먹어본 적이 없다.
저녁을 먹고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간을 넘어가는 까미노에서 각자가 느끼는 것을 공유했다.
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인데 엄청나게 깊은 감정을 나누고, 또 서로에게 공감했다.
JS님이 간 후에도 남은 에어비앤비 메이트 넷이서 새벽 3시까지 떠들었다.
이 바람에 HY님마저 계획에 없던 레온 일정을 하루 추가했다.
León day 2
늦잠을 자고 일어난 둘째 날.
나는 이 날 Candy, Kim과 함께 레온 대성당을 가기로 했었다.
오후 1시쯤 만나기로 해서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데, 갑자기 침실 불이 꺼졌다.
사실 유럽에서 이 정도 정전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냥 우리 숙소 건물만 잠시 정전이겠거니 했다.
근데 만나기로 한 Candy와 연락하다 보니 도시 전체가 정전이라고 했다.
어찌 됐건 1시에 만나기로 해서 나는 시티로 나갔다. 서서히 데이터도 안 터지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만난 Kim이 이 정전이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3국의 정전이라고 알려줬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훨씬 심각했다.
일단 카페에서 뭘 좀 먹자고 하고 케이크를 주문해 먹었다.
카드기가 안 돼 계산은 물론 현금으로 했다.
성당도 정전의 여파로 문을 열지 않았고, 멈춰버린 도시에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각자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4시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숙소에 돌아와 할 일 없이 잠만 잤다.
성당도 오늘 내내 못 보는 것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4시부터 입장 가능했다.
쨍쨍한 날씨에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하게 빛났다.
'정전이 된 날에 해가 쨍쨍하다는 게 얼마나 축복이니'라는 Kim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정전으로 모든 게 멈춘 시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는 카오스 그 자체였다고 하던데, 레온은 카오스가 올 정도의 대도시는 아니었나 보다.
시티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업을 계속하던 레스토랑이 있었다.
거기도 다양한 메뉴는 못 만들지만, 샐러드 같은 음식은 여전히 제공하고 있었다.
Kim, Candy,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그 레스토랑에 갔다.
나는 전날부터 불닭짜장이 너무 먹고 싶었고, 이 날 저녁으로 먹기로 약속도 한 상태였다.
언제 정전이 끝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오늘 내로 해결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JH, SY, HY을 만나 다시 돌아간 숙소.
하루 종일 이상할 정도로 잠이 왔고 돌아가서 또 잤다.
그렇게 자던 중, 정말 기적처럼 8시에 정전이 복구됐다!
복구되자마자 시티에서 열려있던 슈퍼를 가 치킨볼을 사 왔다.
그리고 벼르고 벼르던 불닭 짜파게티를 끓였다.
어제 남은 목이버섯까지 한가득 넣고, 이렇게 탈 많던 시티에서의 대정전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나의 순례길엔 에피소드 하나가 추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