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 이렇게 쉬어가는 날도 있는 거겠지

레온 -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by 정한결

추억거리가 넘쳐나는 레온에서의 시간 이후, 다음 목적지는 20km 거리의 Villadangos del Páramo(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이곳은 허허벌판인,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만한 동네이다.


하지만 공짜 숙소가 생겼기 때문에 그런 곳에 묵기로 했다.

에스텔라부터 좋은 인연으로 함께했던 Candy.

적지 않은 나이에 까미노를 도전했던 그녀지만, 급격히 안 좋아진 무릎에 레온에서 일정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레온 바로 다음의 마을까지 숙소 예약을 해두신 상태였어서 나에게 이렇게 공짜 숙소의 행운이 찾아왔다.


짧은 여정이었고, 레온 에어비앤비에서 같이 지낸 사람들과 목적지도 다르기 때문에 혼자 8시가 넘어서 느지막이 출발했다.


대도시에서 외곽으로 나가는데 순례자의 동상이 있었다.

누가 봐도 지쳐 보이는 얼굴도 기억에 남지만, 신발을 벗고 쉬고 있는 게 제일 인상 깊었다.

길을 걷는 순례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모습이었다.


특징 없는 평탄한 20km의 길이었다.

지겨움과 지침이 합쳐져 내내 걷기 힘들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작게 준비된 도나티보 바를 보며 순례길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 날은 목적지까지 300km 지점을 돌파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드디어 앞자리가 2가 된 비석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실은 나 자신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짧은 거리지만 엄청나게 천천히 걸은 탓에 1시가 넘어 도착했다.

오늘의 알베르게는 정말 허허벌판의 고속도로 한가운데 있었다.

미국 영화에 나오던 모텔 같은 풍경이었다.

Candy가 1인실을 예약하신 덕분에, 또다시 순례길에서 공짜로 호사를 누렸다.


근처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기도 했고, 숙박비가 굳기도 했고, 겸사겸사 저녁은 숙소에서 파는 메누 델 디아가 됐다.


본식이 나오기 전부터 와인과 빵을 주셔서, 본식을 시작할 땐 이미 알딸딸한 상태였다.

라자냐와 돼지고기구이와 감자튀김에 빵까지 남김없이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이렇게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왔더니 9시였다.

해가 채 지지도 않았지만 알딸딸한 술기운에 이르게 잠이 들었다.

잠에 들면서도 20km 밖에 안 걸었으면서 힘든 티는 혼자 다 내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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