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 고지대에서의 하룻밤

아스토르가 - 폰세바돈

by 정한결

다음 목적지는 25km 거리의 Foncebadón(폰세바돈).

폰세바돈은 산 꼭대기로 가는 길에 위치해 지대가 높다.

알베르게 예약에 실패하고 정원이 20인밖에 되지 않는 기부제 알베르게가 오늘의 목적지였기 때문에 삶은 계란과 요거트를 먹고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순례길 걷는 게 한창일 때, 타이밍 좋게 ‘잔나비’가 새 앨범을 발매했다.

까미노 위에서는 남는 게 음악들을 시간이다.

이 날은 특히나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이 적어, 온전히 잔나비의 음악을 만끽하며 걸을 수 있었다.


이 앨범의 타이틀곡 ‘사랑의이름으로!’

인연끼리의 사랑만이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을 담아냈다는 이 노래.

그래서 그런지 구석구석 사람의, 사랑의 힘이 뻗쳐 있던 까미노를 생각하면 이 노래가 떠오른다.

들을 때마다 그때의 내가 되는, 나의 까미노 테마곡.

“이 시절을 기억해! 그리 길진 못할 거야!“


이 날의 길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길거리의 실링왁스 아티스트.

원하는 디자인을 고르면 순례자 여권 크레덴셜에 알록달록한 실링왁스 쎄요를 찍어준다.

기부제로 운영돼서 원하는 만큼 금액을 지불하면 된다.


크레덴셜과 일기장에 각각 하나씩, 순례길 위 유명인사의 흔적을 남겼다.


중간에 쉬어간 마을 El Ganso(엘 간소).

순례길 위 한국인은 거의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처음 보는 젊은 한국 남자분을 만났다.

비교적 여유롭게 걸으니 훨씬 늦게 출발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잠깐 이야기를 하고, 그분이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건넨다는 달달구리들도 받았다.


이후엔 한국인 아저씨를 만나 한동안 함께 걸었다.

흔히들 말하는 ‘백문이 불여일견’에서 나아가, 보는 것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백견이 불여일행’의 자세를 말씀해 주셨다.

순례길을 걸은 지 한참이 됐는데도 이런 말을 들으면 내가 꿈만 꿔오던 이 길을 실제로 걷고 있구나가 실감 나서 또다시 감동하게 된다.


한동안 꽤나 무난한 길만 걷다가 다시 고비였다.

목적지가 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있다 보니 막판 5km 정도는 끝없는 오르막이 펼쳐졌다.

여기에 비 때문에 길도 진흙탕으로 엉망이었지만, 이 또한 지금 비가 오는 것 보다얀 백배 낫다며 또다시 감사를 되새겼다.


그렇게 출발한 지 약 6시간 만에 목적지 폰세바돈에 도착했다.

지대가 높다 보니 오들오들 떨릴 정도로 기온이 낮았다.


설상가상으로 1시에 오픈이라고 적혀있던 알베르게는 2시 반에 오픈이었다.

2시간여를 알베르게 앞 의자에 앉아 덜덜 떨었다.

선착순 줄을 서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초콜릿을 나눠먹으며 추위를 견뎠다.


체크인 후 씻고 나선 따듯한 공용 공간에서 커피를 마셨다.

주방은 없지만 전기포트와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어떻게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침에 챙겨 온 삶은 계란까지 곁들이니 훌륭했다.

걷는 내내 느끼는 점이지만 라면은 확실히 한국인의 소울푸드이다.


일기 쓸 볼펜 잉크가 거의 달아 새로운 동네를 갈 때마다 마땅한 볼펜이 있나 기념품샵을 돌아보는 게 루틴이 되었다.

비가 오지 않는 맑은 하늘인데 낮부터 이미 날씨가 너무 추워 밤이 걱정됐다.


저녁으로는 작은 테이크아웃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한 조각 사 먹었다.

산이라 기대했던 노을은 희미한 빛깔만 남기고 사라졌다.


선착순 20인 알베르게에 20인은 이렇게 한 방에서 모여서 잔다.

1cm만 움직여도 엄청나게 삐걱거리는 오래된 침대였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침대 귀퉁이에 가지각색의 빨래를 널며 잠드는 모습이 웃겼다.


사람이 이렇게 몰려있으니 코골이 소리가 엄청나겠다고 걱정했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밤이었다.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밤에 삐걱거리는 침대까지

단 한 명도 숙면을 취한 사람이 없는 게 그 이유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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