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세바돈 - 폰페라다
말도 안 되게 추웠던 폰세바돈의 알베르게.
안 그래도 지대가 높아 추울 수밖에 없는 동네인데, 알베르게조차 야생의 그것이라 단열이 잘 되지 않았다.
알베르게에서 자다 보면 자주 느끼는 감정이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인데, 다음날에 대한 기대감이 아닌 밤이 너무 힘들어서 드는 감정이다.
특히 나는 침낭도 없었기 때문에 추운 알베르게에서 잘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폰세바돈에서 추워서 깨서 아침과 가까울 거라며 기대하고 시계를 봤는데 밤 11시 40분이었다. 이때의 절망감을 잊을 수 없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추위 때문에 깨며 아침이 오기만을 바랐다.
여기에 살짝 뒤척일 때마다 미친 듯이 삐걱거리는 침대까지.
한 방에 모인 20인이 모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숙소 컨디션 치고 구글맵 평점이 상당히 높아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최악의 컨디션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주인아주머니가 조식을 차리기 시작하셨다.
빵과 잼과 과자와, 냄새가 향기로운 커피까지 내리셨다.
다들 피곤에 절어있다가 생기를 되찾고 아침을 먹었다.
이렇게 아침을 든든하게 먹으니 늦은 체크인 시간과 숙소 컨디션에도 평이 좋은 이유를 납득해 버렸다.
나가려는데 밖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안 그래도 추운 밤을 보냈기에 나가기가 더더욱 두려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바람인 줄 알았던 뿌연 형체의 정체는 구름이었다.
어슴푸레한 하늘에 뿌연 구름까지. 전설의 고향이 따로 없는 출발이었다.
시작한 지 30분여 만에 순례길 위 유명한 랜드마크, 철의 십자가 Cruz de Ferro에 도착했다.
순례길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 각자의 바람과 용서를 위한 기도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높게 솟아올라있는 철 십자가 여기저기에 여러 사람의 기억이 담긴 물건들이 끼워져 있다.
나는 기독교인 데다가 눈물이 많은 편이라 길 위의 십자가나, 사진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많이 났었다.
이곳도 그런 느낌으로 엄청나게 홀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명한 거점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관광지 느낌이 많이 났다.
모든 사진에 다 걸려있는 우비 입은 아저씨도 계셨다.
싫진 않았다. 이런 면조차 순례길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흐리고 비까지 한두 방울 내리던 날씨가 철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개었다.
첫날 피레네 산맥 이후로 늘 비슷한 도로만 봤었는데 이 날을 기점으로 또다시 새 풍경이 펼쳐졌다.
산맥을 오르는 과정이라 그런지 확실히 눈에 익은 까미노의 풍경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한 달 가까이 까미노를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익숙해지고, 지겹다는 생각이 들 때마저 있었지만 다시 눈앞에 보이는 산의 풍경은 이 길의 감동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 루트를 최고로 예쁜 길로 뽑는다.
하지만 '자연이 아름답다'의 다른 말, '길이 험하다'.
오르막은 전날에 거의 올랐기에 많이 없었지만 거의 모든 길이 내리막이었다.
평소에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잘 걸으시는 중년층이 이 길에서 많이 고생하셨다.
끝없는 내리막을 걷다 보면 '어차피 내려갈 건데 어제는 왜 올라간 거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든다.
또 이와 동시에 터널이라는 현대 문명에 감사하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내리막이 오르막보다 더 힘들다는데 나는 아무리 그래도 내리막은 오르막에 비교가 안 된다는 입장이다.
오르막보다 훨씬 빠르게 질주하니, 같이 걷던 대학생 EJ님과 YH님이 나에게 날다람쥐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5살 어린 동생들에게 날다람쥐 얘기를 듣다니, 기분이 좋았다.
이 날의 또 다른 포인트는 지대가 달라질 때마다 바뀌는 식물군상이다.
다양한 종류의 꽃과 식물을 보면서 자연의 신비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개울과 예쁜 다리가 있는 Molinaseca(몰리나세카).
이 동네를 기점으로 드디어 미친듯한 내리막이 끝나고, 목적지인 Ponferrada(폰페라다)까지는 평지 7km의 수월한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바쁘게 도착한 폰페라다 대형 도나티보 알베르게.
도나티보 알베르게 치고 시설이 엄청 좋고 깔끔해서 놓칠 수 없었다.
레온부터 남은 쌀을 가지고 다녔었는데, 이 날 쌀을 처분할 목적으로 저녁은 리조또로 정했다.
쌀이 익기 시작하니 양이 엄청나게 많아져 양조절에 대실패 했다.
하지만 6시간 동안 산을 탄 우리의 식욕이 이 많은 양을 이겼다.
슈퍼에서 산 코돈블루와 함께 만든 샐러드까지 이 많은 음식을 여자 세 명이 먹어치웠다.
여기에 후식으로 감자칩과 아이스크림까지 놓치지 않고 먹었다.
일찌감치 목적지에 도착해서 깨끗하게 씻은 후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까미노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