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페라다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25km 거리의 Villafranca del Bierzo(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가 목적지였던 날.
그다지 길지 않은 무난한 거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길이 멀지 않더라도 해가 뜨기 전에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외곽지까지 걸어가 몽글몽글한 구름이 가득한 하늘의 일출과, 한국의 시골 같은 길을 걸었다.
양 떼가 있어 사진을 찍던 중, 프레임 안으로 Jørund이 들어왔다.
폰세바돈 가는 길에서 처음 만났던 노르웨이에서 온 순례자.
잠깐 이야기를 하다 잠깐 쉬어가고 싶어 들린 바.
여기서 헤어질 줄 알았는데 그도 아침을 먹는다고 해 함께 음식을 먹고, 그 후 오랜 시간을 함께 걸었다.
뜻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눠 아직까지도 자주 기억나는 나의 순례길 메이트.
처음 통성명했을 땐 Dani라는 친구도 함께였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이 날은 온전히 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여행 가본 곳 중 가장 좋았던 나라가 노르웨이라고, 그도 가보지 않은 노르웨이 북극도시 트롬쇠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라고 말하니 생각 이상으로 반가워했다.
나라도 웬 노르웨이 사람이 대한민국 해남에 가본 적이 있다고 하면 반가울 것 같긴 하다.
수많은 얘기 중에 가장 좋았던 건 까미노 시작 날 생장피에드포르에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 같다는 말.
늘 같은 일상의 루틴 속에서 살다가 까미노에서는 매일같이 다른 배경을 가진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만난다.
보통의 삶이라면 1년 동안 만나기도 힘든 그 수많은 가능성들을 한 달 안에 압축해서 만난다.
이렇게 생각하니 까미노 안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듯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바깥의 한 달과 까미노의 한 달은 같을 수가 없어.
까미노 안의 압축된 경험으로 우린 여기서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살게 되는 걸까?
비야프랑카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이렇게 서로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걷다가, 의도치 않게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로 걷게 됐다.
오히려 좋았다.
나누는 말들도 소중했고, 지나치는 작은 동네들의 풍경도 아름다웠다.
서양인들과 걸으면 발에 부스터를 단 듯 빠르게 걸어 속도가 처질 일도 없었다.
그리고 출발한 지 5시간 반도 안돼 도착한 목적지.
원래 계획은 비야프랑카에서 가장 큰 공립알베르게에 가는 거였는데, 전날 밤 후기에서 엄청 큰 베드버그를 보고 급하게 숙소를 예약했다.
씻고 빨래까지 마치니 EJ님과 YH님이 도착했고, 함께 디아로 가 식사할 거리를 사 왔다.
공립 알베르게엔 큰 주방도 있어 엄청난 음식을 해 먹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새로 예약한 숙소엔 주방이 없었다.
다행히 전자레인지는 하나 있어서 이걸로 해 먹을 수 있는 최대의 효율을 생각했다.
단백질 함량이 엄청날 것 같은 닭고기를 공동으로, 각자 샐러드와 라자냐와 라면을 곁들였다.
비야프랑카는 나영석 PD의 예능 ‘스페인 하숙‘을 찍은 곳이다.
나는 모르는 예능프로이지만,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까미노에 로망을 가지게 된 한국인들이 많다.
동행인 YH님도 이 프로그램의 큰 팬이었고, 그래서 이 동네에 온 것만으로 감격했다.
실제로 예능을 찍었던 알베르게를 함께 찾았다.
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아 나는 ‘여고괴담’ 같은 바이브라고 생각했지만, TV로 보던 곳을 마주한 YH님은 기뻐했다.
늦은 저녁, 공용 공간에 불이 꺼질 때까지 함께 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이번 알베르게는 담요도 있었다.
덮을 게 있는 숙소 자체가 적은데, 순례길 초반엔 베드버그가 무서워서 이렇게 준비되어도 덮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틀 전 폰세바돈에서 동사의 위기를 겪고 나니 베드버그 따윈 두렵지 않게 됐다.
당장의 추위가 베드버그보다 훨씬 무서웠다.
다음날은 극악의 산행이 예정된 날이었다.
조금의 두려움을 안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