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 순례길에 우비를 꼭 가져와야 하는 이유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 리냐레스

by 정한결

Castile & Leon 주에서 Galacia 주로 넘어가는 루트의 날.

주의 경계에 산이 있어 이 산을 넘어야만 다음 목적지로 갈 수 있다.

첫날의 피레네 산맥만큼 힘들다는 말이 있어 긴장을 하고 6시 반에 일정을 시작했다.


이 루트를 걸으면 보통 산맥 꼭대기에 있는 O Cebreiro(오 세브레이로)에서 머물게 된다.

하지만 그다지 좋지 않은 공립 알베르게 시설과, 긴 코스를 이틀에 끊어서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산 꼭대기에서 3km를 더 걸어야 하는 그다음 마을 Liñares(리냐레스)를 목적지로 하기로 했다.


초반 10km는 처음 보는 유형의 길이 나왔다.

끝없이 이어진 고속도로 같은 길이었다.


전날 저녁 온 비 때문인지 도로가 달팽이 밭이었다.

순례길을 걸으면 심심찮게 보게 되는 검은색 민달팽이.

이 날 엄청나게 많은 달팽이를 보며 얘네도 생김새가 다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초반 10km가 중간 마을 없이 이어지는 길이었지만 생각보다 빠른 템포로 도착했다.

지난번 첫 번째 바를 지나쳤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얻은 교훈을 토대로 눈앞에 보이는 첫 바에 입장했다.

까미노의 교훈: 눈앞에 바가 있을 때 가야 한다.

또르띠야와 초코빵까지 든든하게 아침을 먹었다.


쉬다 나오자마자 EJ님이 마르지 않아 가방에 매달아 놨던 빨래가 물웅덩이에 떨어졌다.

당장 가져다 버리겠다는 걸 나와 YH님이 간신히 뜯어말렸다.

일정의 1/3 밖에 못 왔는데 셋다 이미 실성해서 미친 듯이 웃었다.

아마 이때부터 오늘 우리의 고생길을 예감했던 것 같다.


31km의 기나긴 일정이었기에 흐름을 유지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한 번 텐션이 떨어지면 살리기가 어려운데, 17km 지점부터 급격히 속도가 떨어졌다.


다음 거점은 20km 지점 Las Herrerias(라스 헤레리아스).

20km나 걸었는데 아직 10km가 넘게 남았다는 게 순례길의 헛웃음 나오는 포인트이다.

산맥이 나오기 전 마지막 마을이었기 때문에, 배가 별로 안 고팠지만 의무감으로 사과를 사 먹었다.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알고 있기에 열심히 징징대고 이 마을에서 묵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드디어 등산의 시작.

저녁에 비가 예정되어 있는 데다가 다음날 목적지가 코인빨래방이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이 날은 옷을 빨지 않는 게 목표였다.

그런 목표가 무색하게 오르막을 오른 지 5분 만에 엄청나게 땀이 나기 시작했다.


폰세바돈에 오를 때도 등산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산의 위력은 대단했다.

말 그대로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정상까지 8km가 3.4 / 2.3 / 2.3km로 나누어져 있는데 마지막 2.3km를 남기고 참을 수 없어 제로콜라를 사 먹었다.

올라오는 모두 제로콜라 생각이 간절해 보였다.


마지막 2.3km 구간이 기억에 남게 아름다웠다.

앞 구간이 경사가 높고 흙, 돌로 이루어진 길이라면 이 길은 훨씬 완만한, 초록 자연의 길이었다.


구름이 가득 꼈지만 다행히 등산 중에는 비가 안 왔다.

아닌 게 아니라 스페인 가장 서쪽의 갈라시아 지역은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마지막 구간은 은퇴 후 10년 동안 꿈꾸시던 까미노를 왔다던 한국인 아저씨와 함께 걸었다.


멀리서부터 파이프 음악 소리가 들린다면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했다는 증거!

힘들긴 했지만 첫날의 피레네 산맥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피레네 난이도는 까미노의 그 어떤 길도 넘지 못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목적지인 곳이지만 우리에겐 3km의 추가 여정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유명한 식당이 많은 이 동네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바다와 붙어있는 갈라시아 지역은 해산물이 유명하고, 특히 문어요리 ‘뽈뽀’가 유명하다.

식당에 가서 인당 menu del dia(오늘의 메뉴) 하나씩과 뽈뽀를 추가로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와인부터 넉넉하게 한 병을 주셨다.

빈속에 있는 대로 땀까지 뺀 상태였던 우리는 무지성으로 와인을 들이켰다.


엄청난 양의 볼로네제 스파게티와 스테이크, 닭고기까지 먹고 추가로 주문한 뽈뽀까지 엄청난 속도로 먹어치웠다.

문어를 잘 안 먹어봐서 비교가 어렵지만 야들야들한 문어 살을 감자, 빵과 곁들이는 음식이라니. 이건 맛없기가 더 어렵다.

여기에 후식으로 각자 아이스크림과 쌀푸딩까지 맛있게 비웠다.


빈속에 와인부터 때려 부으니 셋다 거하게 취해버렸다.

제일 빠르게 취하는 방법은 땀을 빼고 술을 먹는 거라는 인생의 지혜를 의도치 않게 깨우쳤다.


취해서 정신없는 채로 앉아있는 한국인 셋이 너무 웃겼다.

여기서 여정이 마무리되는 거였다면 웃기기만 했겠지만 3km의 여정이 뼈저리게 걱정되기도 했다.


식당에 있을 때부터 비가 미친 듯 오기 시작했다.

출발을 미루며 비가 그치길 기대했지만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운 좋게 비 타이밍을 피해 다니고, 비를 맞더라도 많은 양이 아니어서 바람막이로 해결했다.

하지만 이 날의 비는 바람막이로 커버될 정도가 아니었다.

결국 오랫동안 가방에 처박혀있기만 했던 우비를 꺼내 입었다.


셋 다 휘청거릴 정도로 취해서 살짝 걱정이 됐는데, 걷기 시작하자마자 술이 다 깨버렸다.

엄청난 폭우에 말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꺼내면 망가질까 걱정돼 그저 끝없이 걷고 걸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리냐레스는 보통 사람들이 많이 묵는 곳이 아니라 알베르게가 2개뿐이었다.

체크아웃이 6시까지였는데 비를 뚫고 아슬아슬하게 5시 40분에 도착했다.


땀과 비로 샤워했지만 이 정도 폭우에 빨래를 하는 건 다음날 하나도 안 마른 옷을 입고 걷겠다는 말과 같았다.

너무 더러운 상태였지만 하는 수 없이 빨래를 포기했다.

더러운 꼴 때문에 도시에 가겠다는 의지가 더 활활 타올랐다.


늦게 해질 때쯤엔 비가 그쳐서 엄청나게 큰 구름과 노을도 봤다.

오 세브레이로에 있던 사람들은 이 날 무지개를 봤다고 했다.

순례길에서 한 번쯤 무지개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3km를 더 걸어서 놓쳤지만 후회는 없다.


해도 다 지기 전부터 누워 잘 준비를 했다.

오래 걷고 많이 걷고 등산하고 땀 흘리고 비 맞고, 까미노에서 가능한 모든 종류의 고생을 다 한 날이었다.

다음날의 일정이 더 고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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