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냐레스 - 사리아 (por 산 실)
전 날 폭우를 뚫고 도착한 리냐레스.
산맥을 넘으며 땀을 왕창 흘리고 비까지 쫄딱 맞았지만 나쁜 날씨에 더러운 옷을 한번 더 입을 수밖에 없었다.
좋지 않은 날씨에 축축하게 젖었던 신발도 그대로였다.
여정 시작점부터 젖은 신발을 신어야 한다니, 순례길 전체를 통틀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기분 중 하나이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서 사리아까지는 약 66km.
보통 사람들이 3일에 걸쳐 가는 이 길을 우리는 이틀로 끊었다.
더러운 옷과 신발 덕분에 오히려 사리아에 가겠다는 열망이 더 불타올랐다.
갈길이 멀어 6시에 일정을 시작했다.
홀로 랜턴에 의지해 까미노를 걸을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 날 길은 혼자라면 엄두도 안 날 만큼 무서웠다.
깜깜한 데다 안개까지 가득해서 랜턴을 켜고도 시야가 뿌옜다.
안개와 동산을 너머 한계라고 느껴질 때쯤 바에 도착했다.
전날 저녁을 4시쯤 먹고 아예 빈속이었기에 더는 한계였다.
이 바에선 순례길 전체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또르띠야를 팔고 있었다.
4유로라길래 비싼 내심 놀랐는데 케이크처럼 거대한 조각에 더 놀랐다.
여기에 의도에 없었던 카페콘레체까지.
앞으로 걸을 길이 오만 리인데 시작한 지 2시간도 안 됐을 때부터 지쳐서 걱정이었다.
바에서 나와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를 핑계로 다른 바에 또 가서 이번엔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아무도 떠나자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다들 지친 상태였다.
걷던 중에 Jørund와 다시 만났다.
이번엔 카나리아에서 오신 Christina라는 분과 함께였다.
이 둘은 자연의 기운을 받겠다며 거대한 나무를 한참 끌어안고 있었다.
출발지에서 18km 지점인 Triacastela(트리아카스텔라).
이 지점에서 사리아로 가는 길이 두 개로 갈린다.
하나는 사모스를 통해 가는 19.7km의 길, 다른 하나는 산실을 통해 가는 12.5km의 길이다.
이미 20km 가까이 걸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짧은 길을 선택했는데, 이게 재앙일 줄은 몰랐다.
다행인 건 이 마을을 기점으로 날이 완전히 갰다.
우비를 꺼냈다 접었다 하지 않아도 되는 거만으로 좋았다.
불행인 건 엄청난 오르막과 내리막이 시작됐다.
원래 산실은 짧은 대신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데 우린 그걸 모르고 그냥 이 길을 택했다.
전날 오세브레리오 산맥을 올랐지만 그 길과 비교도 안되게 가팔랐다.
비가 내린 상태라 길이 엄청나게 미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번 언급했듯, 까미노에서 길이 험하다는 건 곧 길이 예쁘다는 것.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초록의 풍경을 몇 시간 동안이나 봤다.
이 길은 특히나 내리막 경사가 심했다.
며칠간 반복된 등산의 여파인지 무릎 관절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더러운 탓에 무릎, 발목 보호대를 하지 않은 게 후회됐다.
하지만 산실 루트의 최대 장점, 까미노에서 가장 유명한 도나티보 바 중 하나인 Terra de Luz가 이 위에 있다.
구글 평점 중 이곳이 오아시스 같다는 얘기가 있는데 미친듯한 내리막길을 걷고 만나니 그 말이 십분 이해됐다.
유명한 곳이라 복작복작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너무 늦게 온 탓인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돌로 만든 건물, 여기저기 걸린 깃발에 각종 장식품까지.
자유로운 분위기가 히피스러움을 극대화시켰다.
나는 벽에 붙은 이 문구, “Be the reason why people believe in love again“ (사람들이 사랑을 다시 믿는 이유가 돼라.“) 가 특히 좋았다.
나의 인생모토 같은 말이다.
중앙엔 각종 과일과 빵과 주스까지 없는 게 없었다.
요거트와 그래놀라까지 있어서 오랜만에 좋아하는 요거트볼을 해 먹었다.
일정액 기부를 하고 정신없이 배를 채우는데 주인같이 보이는 분이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카페콘레체를 꽃과 빵과 함께 담아서 가져다주셨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다.
이렇게 먹고 쉬다 보니 Terra de Luz, 빛의 땅이라는 이 도나티보의 이름이 너무 감사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순례길 위의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이 모든 걸 베풀 수 있는지.
산실 고생길은 이 감사함을 느끼려 택했나 보다 싶었다.
한참 쉬는 중에 Jørund가 들어왔는데 가득 쌓인 음식을 뒤로하고 곧장 소파에 놓여있던 기타를 쳤다.
순례길 위 평화롭고 로맨틱한 광경이지만 음식에 홀려버렸던 나에겐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여기서 나왔을 땐 이미 3시가 지나있었다.
평소라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우리에겐 여전히 10km의 길이 남아있었다.
셋 다 해탈한 지 오래였고 5시에만 도착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은 길이 날씨가 좋았다는 것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구름이 적당히 낀 날씨였다.
사리아를 목전에 두고 EJ님과 YH님은 막판 스퍼트를 냈고, 나는 진이 다 빠져버렸다.
마지막 1시간은 나에게 엄청난 고난의 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숙소.
씻고 나오자마자 이 도시의 목적지였던 코인세탁소로 갔다.
대부분의 알베르게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다지만 도시의 거대한 건조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엄청난 열로 건조된 뽀송한 빨래 냄새를 맡는 게 순례길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사 중 하나이다.
저녁은 사리아에서 유명한 케밥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먹은 케밥이 너무 맛있어서 이 날 이후로 2끼를 내리 케밥을 먹었다.
부르고스에서 카스트로헤리츠까지 40km를 걸은 후 다신 안 깨질 줄 알았던 6만보 기록이 이 날 깨졌다.
오직 빨래 하나만을 바라고 달려온 결과이다.
동네 간 거리는 짧지만 빨래하느라, 밥 먹느라 빨빨거리고 돌아다녀 결국 66,663 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하루 쉴 날이 주어졌다는 행복감을 안고 엄청났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