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

워크숍

by 아는개산책

둘 이상의 인간이 모였을 때

한 사람 바보 만드는 일은

아주

쉬워.


내뱉으면 사라지는 줄 알아

말하는 건

아주 쉬워.


사냥 본능.


누가 마녀야.



워크숍


한 해의 영업방식과 그 결과, 그 밖에 뭔가.

해도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재미없는 이야기들이 시간을 채운다.


-이러려고 스키장까지 왔어.


팀원들의 표정을 하나둘 감상하다가 벽지무늬로 옮겨간다.

천장에 누가 별 스티커를 붙여놓고 간 듯하다.


"이런 자리를 빌어서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사무실에서 욕을 하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주가 봉인을 푼다.

회의주의자들의 회의가 거의 끝나는 분위기에 자유롭게 한 마디씩 건네는 중이었다.

말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도 공기의 온도가 달라진다.


내 얘기만 아니면, 언제나 재미있으니.


"누가 욕을 해요? 사무실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후 전시팀 책임까지 맡게 된 이 부장이 묻는다.


"네, 저는 많이 들었어요. 아마 다들 누구 얘기하는지 아실 거예요."


"응? 그런 일이 있다고? 언제요?"


워크숍에 빠진 인원은 단 하나.

태수가 부모님께 일이 생겼다고 급작스레 지방에 가게 되면서 한 자리가 비어있다.


"김대리님이 직접적으로 현주 씨한테 뭐라 한 적은 없잖아."


태수와 늘 붙어 다니는 그의 부사수 규현이 급하게 나서본다.


"아니이, 규현 씨도 그때 들었잖아요, 저한테 서류 던지면서 X 년이라고 한 거. 그리고 그때뿐이 아니잖아요, 과장님, 과장님도 전에 김대리 때문에 울었죠? 그쵸?"


황급했던 시도에 오히려 불이 붙은 현주는 거짓말쟁이로 몰리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소현과장을 참가시킨다. 얼마 되지도 않은 전시팀원들의 시선은 그 둘의 입에 고정된다.


"어? 어어, 저한테도 그런 적... 있긴 한데..."


소현과장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새x 안 되겠네."


강훈이 나지막이 얘기하지만, 모두에게 충분히 잘 들릴 정도의 거리 안에 앉아있다.

김차장은 터질게 터졌다는 느낌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든다.


"뭐어? 소현과장한테까지? 언제에?"


부장은 눈을 크게 뜨며 오버스럽게 얘기한다.

창립멤버라고 볼 만큼 경력이 쌓여있는 소현과장은 부장이 전시팀으로 오며 함께 데리고 온 여직원.


직원들의 표정을 살핀다.

재밌지도 않은 이야기에 신이 나있다.


주인공이 없으므로.

아무 표정이나 지어도 걸릴 게 없다고 여기는 걸까.


웅성웅성, 각자가 지나가듯 들었거나 직접 부딪혔던, 묵혀진 이야기들이 하나 둘 쏟아진다.

마치, 마른 장작들처럼.


한 명이 불씨를 던지기만 하면 된다.

그 주변으로 한 두 개 장작 몇 개를 추가하고 툭툭 건드리기만 해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보는 이의 심장도 활활 뛰게 한다.


"차장님도 솔직히 말해보세요, 그때 회의실에서, 차장님한테 욕해가지고 컵 깬 거 아니었어요?"


동기 김차장한테 질문이 넘어가며 시선이 집중된다.


-대답하지 마. 김차장.


한 달 전인가,

김차장과 태수가 회의한다고 들어갔던 회의실에서 고성이 나고 이내 컵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는 실수로 떨어뜨린거라고 말했지만.


사실관계 모르는 말들이 쏟아지고, 내가 먼저 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 말을 막으려 일어나는 사람이 있고 아수라장 속에서 엄마무릎을 하고 앉은 나는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 김차장의 입을 바라본다.


막 떼려고 하는 그 입을.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들, 그래도 꽤나 어울렸다고 한 동기간의 모임에서 늘 함께하던 친구 하나가 참석하지 못한 날,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던졌다.


'그거 알아? 희진이 아빠, 회사 그만둔 게 아니고 잘린 거래. 불명예라던데.'


'뭐? 그게 무슨 얘기야?'


겨우 네 명이 모인 자리였다.

희진을 제외하고.

이야기는 이제 막 질소가 들어간 풍선처럼 쉽사리도 부풀어 올랐다.


'하. 나도 말하기 어렵다, 나도 다른 애한테 들은 거라서. 걔 아빠... 성추...'


눈을 반짝이며 이때다 싶은 그녀의 말 사이로 강은의 낮은 목소리가 섞였다.


'야, 그만하자. 자리에도 없는 애 얘기를 우리끼리 하는 건 아닌 거 같애. 그것도 가족얘기를. 우린 친구잖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소문의 끝을 들으려고 하는 친구도 아닌 친구였다.

그런 내가 미치도록 부끄럽게 만든 강은의 한마디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다.


"아 그때는, "


김차장의 말을 막아선다.


"이제 제가 발표하면 안 돼요?"


워크숍이라고 자료까지 뽑아온 내가 뭐가 되니.

나도 말할 기회 좀 주라.


"아니이, 차장님. 제가 차장님한테도 전에 말씀드린 적 있잖아요, 이 얘기 먼저 하고"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현주는 어떻게든 오늘 끝장을 볼 셈이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니, 없잖아."


"그러니까 일단 들어보시라니까요."


"태수... 아니 김대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제가"


"김대리 있을 때 회사 가서 다시 하면 되지. 너 말을 못 믿는다는 게 아니고, 걔 얘기는 못 들어보잖아 여기서."


"아니, 차장니임."


"그리고 나 자료까지 준비해 왔어."


나는 가방에서 들고 온 서류 뭉치를 주섬주섬 꺼내어 한 사람씩 앞에 가져다 놓았다.

반쯤 서거나 서 있었던 이들이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다.


-분위기 좋으면 안 꺼내고 스키나 탈랬드만.


제목은 영업전략- 복장의 중요성.


매일 작업복만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책에 나온 대로 짜깁기 스킬.


자료를 읽어가기 시작한다.

피티는 아니니까 그냥 책 읽듯이 줄줄.


'뭐야아, 이 타이밍에'


옆자리에 앉은 강훈이 조그맣게 귀에 속삭이듯 말한다.



스키


"차장님, 스키 타봤어?"


"타보긴 했지."


-한 번.


인사불성의 밤이 지나고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나도 설경을 즐기고 싶은 소녀의 마음으로 중턱까지 어떻게 더듬더듬 기어는 왔는데.


"나도 처음이야. 흐흐, 진짜 선생 붙여줘서 다행이에요. 그치?"


리원이 말하며 안경을 벗어 닦는다.


"어, 선생 있다 안 했으면 안 왔어."


한 시간짜리 강습이니, 이건 받아야 해. 하고 워크숍까지 따라온 것이 과연 잘 한 건지 아직 의문이다.


세상에 공짜가 있으려나.


"어제 한창에 말이나 끊고 말야. 고차장님 진짜 재미없어. 나 먼저 간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훈은 내가 어제 흐름을 끊은 것이 못내 불만인 듯 하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뒷모습이.

부럽다.


선생을 기다리다 쭈그리고 앉아 스키화를 이리저리 만져본다.


"어제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그치?"


다시 어제 얘기를 꺼내려드는 리원의 안경을 뺏어든다.


"시력 얼만지 나도 좀 보자."


두꺼운 안경을 귀에 거니 스키장 저 아래가 빙글빙글 도는 게 이것은 위험한 물건인가.


스르륵.


"응?"


미끄러진다.


"아? 아? 잡아, 잡..................."


스키날이 가장 잘 선 것이었나.

그대로

그대로


속력이 붙는다.


"꺄아아아아악"


얼마 만에 질러보는 비명인지.

속도 미쳤다.


"잡아줘!~~~~~~"


쭈그린 채로 그대로 내려가는 스키날에 무엇부터 해야 하나 머리가 돌지 않는다.

안경부터 벗어야 하나.

일어서야 하나. 앉아야 하나.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 뒤로 사라져 간다.


이런 일등.

바란 적도 없는데.


왜 끝도 없이 내려가고

분명히 무언가 슬로우처럼 흘러가는데 이런게... 가속도?


"아아아아아악악악~~~"


강훈이 입었던 것과 같은 파란 슈트가 보인다.

그가 뒤돌아 선다.

분명, 봤다.


"강~~~~~~~~~~~~훈~~~~~~~~~~~~~~~"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건 내 꺼.


들어간다.

조그만 여자 하나.

그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통과.


"꺄아아악"


"으헉"


강훈의 외마디가 들리고,

안경은 바지에 한 번 걸렸는지 주우우욱, 나의 이마를 깊게 파며 눈에서 머리까지 올라간다.

피.

나는 거야 또?


통과하면서 줄어든 속도를 타고 누군가 앞으로 와 몸을 웅크려 앉았다.

그대로 부딪힌다.


기억은.

쉽게 상실되는 것이 아니다.

기절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사냥이 끝났다.

나는 수사슴처럼 이마에 내천자가 새겨졌고

어제 일이 불만이었던 강훈은 바로 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전시팀의 워크숍이 끝이 났다.


며칠 전.

크리스마스에 연이어 주말까지 연차 이틀을 낸 중에 걸려온 강훈의 전화.


"워크숍? 난 못가."

"아 왜에. 차장님 간식담당이야. 사다리탔어 이미. 우리 다 굶길거야?"

"아씨. 가다가 사 쫌."

"재밌게 해줄께 가자"

"아ㄴ,.."


뚝.

우씨.


그래서 안온다고 했잖아 내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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