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2)

X의 헌신 (5)

by 아는개산책

안개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받아줘


신호가 길어진다.

역시 받지 않는다.


"됐다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


"나한테 사고 나면 네가 마지막 번호다."


혼자 중얼중얼하는 사이에도 휴대폰을 쥔 손은 놓을 수 없다.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체 뭐가 문제냐. 히터를 꺼본다.


"얼어 죽던가, 사고로 죽던가."


서울 가는 길은 맞긴 한가.

가끔 네비도 내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생각을 앞세우는 것 같다.


입김을 호 불어 앞 유리를 문질문질 닦아보지만 택도 없다.

그럼에도 차는 5의 속도로 달리고는 있다.


옆에서 누가 걷기라도 한다면 그 사람이 더 빠르겠지.


-아, 걸어가까?... 산... 얼마나 높을까.. 하... 돌겠네.


지이잉-


"여보세요"


동아줄을 바로 귀에 댄다.

두근-


혹시?


"오늘 출근 안 했어요?"


올레!


크헝.

나 좀 울어도 돼요?



안갯속 대화


"왜 전화를 안 받아요?"


나는 기다렸다는 말 대신 살얼음 같은 뾰족한 말투로 녹아내린 마음을 가려본다.


"아, 안 받은 게 아니라."


쓰윽.

콧물을 닦는다.

듣고 싶다. 끝까지.


"저도 오늘 연차라 방에 휴대폰 두고. 그런데 어디세요?"


"뭐 좀 여쭤볼라고요."


"네."


이 고요한 침묵 뒤에 숨어있는 진짜 마음은 뭘까.

하긴, 내 것도 모른다.

안갯속에 가려진 채.


"저 지금 산인데요. 유리가 잔뜩 껴가지구. 안개가 엄청 심해서. 안 없어져요. 앞이 하나도 안 보이거든요."


"네? 우리씨, 어디예요?"


직급 아니고 이름을 부르네. 왜?


"차 좀 아세요?"


"지금 정확히 어디예요?"


"차 아냐고요. 앞이 하나도 안 보인다니깐요."


왜 자꾸 성질이 나지.

왜 나만 이런 날에 지방 출장 오고,

왜 나만 길 잃고 앞도 안 보이고.

왜 나만.


왜.

너는 진짜 연락도 안 하고.


"하... 차가 뭔데요?"


"차종에 따라 달라요? 앞 유리 닦는데 왜 달라요."


싸움이 끝나지 않은 일방적 격투기다.


"흠. 열선 켰어요?"


"어떻게 키는 건데요."


"차 누구 거예요?"


"명의 알아야 돼요?"


"흠... 열선을 앞 뒤로 켜보세요."


"그게 어디있냐구요."


"매뉴얼 없어요?"


"차에 매뉴얼도 있어요?"


"차 빌린 거예요?"


"내 차예요. 매뉴얼 같은 거 없는데. 원래 때 되면 아는 거잖아요. 난 그러는데."


"고우리 씨. 내가 가요? 어디예요, 지금?"


그 말이 왜 이제 나와요. 진짜.


왜 이제.

안심이 되는 거지.


"무서워요 진짜."


"앞이 안 보이니까 무섭죠. 어딘데요."


"잘 모르겠어요. 광주에서 서울 올라가는 길인데. 산이 나와가지구."


옆에 온천탕 같은 표시 몇 개를 눌러본다.

에어컨 바람처럼 세찬 바람이 세게 나오더니 유리가 조금 하얘지다가 다시 금세 얼어붙어 굳고 있다.


"안되는데..."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보험 부를래요?"


"보험 언제 온다구. 그것도 여기 산 완전 위 같은데. 그냥 갈래요."


"그럼... 끊지 말고 나랑 같이 있다고 생각해요. 유리는, 계속 그대로예요?"


"스팀모양 그거 틀면 에어컨 바람처럼 나와서 밑에 조금 없어졌다가 다시 똑같아요, 그냥 가야죠 뭐."


다시 말이 없다.

끊어야 되나.


"왜 그날 전화 안 받았어요?"


깜빡이도 없이 들어왔다.

눈만 껌뻑껌뻑 보이지도 않는 앞유리에 시선을 고정한다.


"진짜 전화 안 하려고 했어요?"


뿌예진 앞을 거둬주세요.


"고우리 씨.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대답할 거예요?"


그는 늘 한 수 위다.

항상 내가 먼저 말이 막혀.


심장이 자기 주장을 시작한다.

눈앞의 공포보다, 너와 나의 관계가 궁금한가 보다.


나의 뜸을 못 이기고, 그가 다시 한번 묻는다.


"내일 뭐 하세요?"


"내일. 이브인데."


날짜를 다시 확인하려 하는 순간 휴대폰이 진동하며 스르륵 미끄러진다.


"아, "


잡으려고 손을 내리는데 살짝 무언가를 건든다.


"어?"


와이퍼가 작동하며 앞 유리의 성에를 말끔히 닦아낸다.


"으악?"


'여보세요? 여보세요? 고우리 씨!'


나를 부르는 소리가 떨어진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다.


-개망. 이게 뭔 일.


"끊겼나?"


목소리는 계속 들리는 것 같은데.


휴대폰을 든다.


통화가 이어져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문자가 보인다.


+울, 잘 지내지? 곧 크리스마스네. 네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행복하게 보내.+

- 이기우


영원한 내편이라는 이름에서 본명으로 바꾸어 저장해 놓은 번호. 그 이름.

2년 전 완전히 끝이 났던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리 씨, 괜찮아요?"


"아, 네. 차장님. 네. 전화를 떨어뜨려가지고."


"아, 괜찮아요?"


"네... 괜찮은데..."


성에는 사라지고 안개가 걷히고 있다.


눈앞에는 분명 그러하다.


하지만.

심장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지만.


드라마는 분명 누군가의 인생을

참고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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