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시간
같은 상황도 사람에 따라 다른 상황으로 인식되는 건,
자기 보호 본능일까.
사람이 하는 말이란,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인가.
타인을 위한 말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 것인가.
그와 그녀
넓게 펼쳐진 잔디 위로 긴 꼬리 까치 두 마리가 주거니 받거니 무언가 주워 먹는다.
-까치 맞지? 오늘 좋은 손님이 오려나.
하지만 쉼터 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저 발은,
그냥 매일 보는 얼굴이 가진 발.
"넌 또 왜."
점심 이후 잠깐의 휴식이 그녀의 입으로 들어가려나 보다.
"차장니임~"
애교가 잔뜩 묻은 그녀의 호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이제 막 일 년 차에 접어든 베이비, 리원.
그녀가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새 담배를 끼워 넣는다.
"짜증나 죽겠어요."
나는 휴대폰 게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이제 이십 분 밖에 안 남았는데, 신기록 얼마 안 남았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 아까 같이 공장 갔다 왔거든요?"
내가 대꾸를 하건 말건 그녀는 큰 상관이 없다.
그런데, 너도 아직 신입인데.
"상현 씨. 진짜 이상해요."
"너보다?"
"나보다 나이 많다고 무시하나?"
"몇 살인데"
"상현 씨요? 서른인가? 스물아홉인가?"
"너는?
"아, 차장님. 지금 한번 더 물으면 진짜 백번째거든요. 저 스물둘이잖아요."
아, 또 죽었다.
다시 보석 맞추기 새 게임을 시작한다.
"아까 기훈 씨랑 공장 다녀왔잖아요. 말씀드렸죠?"
다리를 꼬고 목은 더욱 거북목이 되어 간다.
게임 집중-
"그런데 공장 가도 인사만 하고, 우리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멀리 떨어져서 휴대폰만 하고 있고."
나한테 하는 말인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나이도 많으면서. 나이는 어디로 먹었대."
졸업 후 서른이 다되도록 공부만 하다가 결국 방향을 틀어 처음 취업을 한 거라 들었다.
법 공부였던가.
"아니, 차장님. 듣고 있어요?"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
"네? 그게 다예요."
"어."
다시 게임화면으로 시선을 옮겨놓지만 리원이가 오기 십 분 전, 이미 상현이가 먼저 쉼터에 다녀갔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나를 부르던 그의 첫 말이 떠오른다.
"차장님, 잠깐 저... 바쁘시죠... 말씀 좀.. 시간 되실까요?"
"어, 얘기해요"
잠시 게임을 끄고 이제 한 달도 못 채운 신입, 상현 씨를 바라보았다.
맞은편 벤치에 앉아 손을 모으더니 한숨부터 쉬는 아이.
"혹시 리원씨한테 무슨 얘기 들으셨어요?"
물끄러미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할 말 있어요?"
두꺼운 안경알이 든 안경테를 쓰윽 올리며 몇 번 더 숨을 고르는 상현 씨.
어렵겠지. 무슨 얘기든.
"오전에 기훈 씨랑 리원 씨랑 공장 다녀왔어요. 차장님이 같이 갔다 오라고 하셨다고."
"음. 네."
"저한테는 아예 말을 안 거시더라고요. 기훈 씨랑 리원 씨만 둘이 계속 얘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리원씨가. 아니 둘 다."
"왜요?"
"저도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느낌이... 일도 잘 가르쳐주지도 않고. 공장에서도 말 한마디 안 하고 각자 떨어져 있었어요."
눈을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제가 들어온 게 불편한 것 같아요."
"나이? 음..."
"물어도 대답도 잘 안 해주시고... 한숨만 쉬세요."
몇 번인가 맞은편 자리의 리원에게 신입이 다가가서 기초적인 질문을 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리원이가, 한숨을 쉬었던가?
대화 중간중간에도 한숨이 여러 번 들어가는 그녀의 버릇이 그때도 나왔던 건가.
"그래서요?"
본론은 오늘 나오나. 뜸만 몇 분 째인지.
"아뇨, 그냥... 이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그렇다면 궁금한 건 나도 있다.
"리원이한테도 말해봤어?"
나의 눈을 바라보다가 왼쪽아래로 시선이 떨어지며 고개를 흔든다.
나는 꼬았던 다리를 풀어 반대쪽으로 다시 꼬며 턱을 괴었다.
"그럼. 얘기해 봐, 리원이랑."
"어차피 안 들어주실 것 같고..."
"그건 상현 씨 생각이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땅만 바라보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말 잘하는데 나한텐? 지나치지도 않고. 그냥 지금처럼 하면 되는데."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았다.
"다 과정이야. 상현 씨는 상현 씨대로 하는 거지. 그러니, 필요한 것 같으면 얘기를 해요. 직접."
"네..."
그리고는 혼자 잠시 생각하다가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인 후에 쉼터를 나갔던 그였다.
후-
리원이가 뿜어낸 담배연기가 휴대폰 위로 뿌옇게 날아오더니 그녀의 말이 다시 이어진다.
"아니, 사실은요, 차 타고 가다가. 한 사십 분 걸리잖아요. 중간에 담배 좀 피웠거든요."
"어디서?"
잠깐 고개를 들어 그녀의 옆얼굴을 본다.
"차에서요."
"상현 씨는?"
"몰라요, 상현씬 안 피던데요."
그녀의 말이 빨라진다.
너도 뭔가 느끼니.
"아니, 상현 씨는 어디 있고?"
"뒤에 혼자."
"너희는?"
"기훈 씨는 운전하고 저는 옆에 타고."
리원은 다 피운 전자담배에서 꼬다리를 빼어 휴지통에 버린다.
"그러고 둘이 담배 폈어? 창문은 열고?"
"네. 당연히 열었죠. 그런데 저희가 잘못했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펴도 되냐고는 물어봤어?"
다른 층 사람인지 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쉼터로 들어온다.
리원과 나의 시선이 개를 쫓아 이동한다.
동물은 사랑이니까.
"아. 그걸 물었어야 됐나?"
한 박자 늦게 리원이 대답인지 질문인지를 한다.
"들어가자. 시간 됐다."
아이폰 화면 안에 한시가 찍힌다.
공장 과장님
밖에서는 빨리도 달리는 시간이 사무실에만 오면 느림보 거북이걸음.
시계마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
눈이 잘못되었거나.
분명 엄청난 일들을 쉬지도 않고 끝낸 것 같은데.
"아직 네시네"
"우리, 뭐 사 먹으면 안 돼요?"
맞은편에 앉은 리원이 조용한 입모양으로 얘기한다.
막 대답을 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상현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로 다가온다.
"저, 주임님. 잠깐 말씀 좀..."
가까스로 내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다.
"네? 저요? 네."
리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휴대폰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굳었다.
내 카드.
나는 전화기를 들어 공장에 전화를 건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저 고우리요, 오늘 애들 다녀갔죠? 잘했어요?"
"어, 고차장. 애들? 뭐 잘하고 말게 있어, 그런데 뭐 지들끼리 싸운 건지 말 한마디 안 하던데? 하하."
"네에. 일은, 했고요? 오늘 라벨작업 하는 거. 다른 것도 도울 거 있음 좀 도우랬는데."
"어어, 다 했지. 기훈이랑 리원이는 오자마자 화장실 간다고 사라져서, 상현 씨가 땀 뻘뻘 흘리면서 다 옮기고, 내가 그래서 좀 누워서 쉬랬더니 사무실은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 앉아 휴대폰만 하던데. 나중에 라벨링은 리원이가 했지. 그건 리원이가 아니까"
"네에. 아휴,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뭘. 애들이 다 했지, 암튼 고마워, 어?"
전화를 끊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둘이 사무실로 번갈아 들어온다.
리원은 자리로 오는 꼴로 서류 뭉치를 집어 들더니,
"좀 가르쳐야겠어요. 저, 저기 자리에 좀 있다 올게요."
말하며 한숨을 푹 쉰다.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드는 것은 숨 한번 고르기 전 매번 나타나는 그녀의 버릇.
시간이 지나면 보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리원이가 벌써 일 년이 되었다.
신입도 받고.
사무실은 늘 조용하고.
항상 시끄럽다.
하고 싶다.
자유롭게.
보석만 잘 맞추면 재밌는 게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