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의 헌신 (5)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은 안다.
하지만,
도무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땐,
무얼 보고 무얼 믿어야 하나.
그때서야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있다면,
감각.
마음이 그 뒤를 쫓는다.
그리하면,
길이 보일 지니.
하지만.
그것조차
양 갈래 길이라면.
지방 출장
"배고파."
연의 목소리에 자동적으로 눈이 떠진다.
옅은 아이보리 벽지 속에 점점이 박혀 있는 꽃그림이 벌레인지 무늬인지.
"아... 머리야."
동시에 머리를 움켜쥐고 눈을 질끈 다시 감아버린다.
"그러게, 너 엄청 취했더라."
노래방 대형 화면 코 앞에 서서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힘겹게 부르다 시계를 본 게 한 시쯤이었던 것 같다.
"술은 많이 안 마셨는데... 너무 긴장했나 봐."
"업체랑?"
"어..."
"네가 하고 있는 업체야?"
"처음 봤어 이번에."
크리스마스이브를 이틀 남기고 누가 지방 출장을 가고 싶을까. 광주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직접 미팅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걸려오자 월요일부터 전시팀이 꽤 분주했었다.
평소 같았으면 누구 하나 빼지 않고 새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되겠다고 앞 다투어 자원했겠지만, 이번 주는 일 년에 단 한번 있는,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는 주간이다.
그것이 모두가 서울을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네가?"
"나 없으면 안 돌아가."
해결은 사다리였다.
부스스한 뒷 머리를 한 줌으로 말아 올리며 창 밖을 본다.
"눈이 그래도 거의 녹았네."
"어, 처음에만 많이 오고 밤에 그쳤나 봐"
잔뜩 긴장한 채로 연구원들과의 첫 미팅이 끝나자, 먼 곳까지 왔는데 그냥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니라며 저녁식사자리까지 초대되었다.
기와가 멋들어지게 장식되어 있던 고깃집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맑았던 하늘에서 거짓말 같이 내리기 시작하던 하얀 눈.
조심스러운 나풀거림에 결정체가 다 보일만큼 투명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눈 예쁘던데."
"눈? 맞지. 진짜 예쁘게 오더라"
해장으로 끊여내 온 콩나물국을 한 숟갈 뜬다.
"고마워, 국. 흐응. 너밖에 없어."
다행히 같은 지역에 자취하고 있는 연이 덕분에 모텔 신세는 면했다.
미팅에 함께 했던 처음 만난 연구원 한 분이 이곳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왜 김시준이 떠오른 거지.
연구원이 쓰고 있던 뿔테 안경 때문인가.
"참, 너 기우 얘기 들었어?"
"기우?"
첫사랑.
나의 눈물.
나의 한숨.
"결혼 깨졌다던데. 윤석이한테 전화 왔었거든."
고등학교 동창과의 연애는 끝이나도.
동창을 만나면 다시 이어진다.
서울행
내려올 때 가벼웠던 몸에 비해 주렁주렁 달고 가야 할 게 늘었다.
"이거 잔세트, 커피 마시면서 내 생각해."
신세는 내가 졌는데, 선물도 그녀가 건넨다.
그리고 한 손에는 특산품이라며 연구원이 건네주던 술병 하나.
"이건, 너 마셔. 혼자 마시지 말고 나눠서 크크"
"정말? 나 줘도 돼? 아냐, 너 가져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손은 이미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 있다.
"갈게, "
헤어질 때 인사가 짧아야,
실감이 안 나.
나의 애마에 올라타서 시동을 건다.
두 시간 반? 세 시간? 금방이지 뭐.
막힘없이 달리는 길에 창문을 내리다가 금세 다시 올린다.
"아우씨, 추워."
-집에 가면 청소도 해야 하고. 오늘은 회사 안 가도 되겠지. 아?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브다.
-크리스마스네 곧.
차량이 점차 줄어든다 싶더니 산길을 오르는 중인가 보다.
돌고 돌고 돈다.
그리고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앞이.
보이지 않아.
안개
-지이익
창문을 내려보니 고개고개도 굽이굽이도 온통 하얗다.
내려앉은 눈들은 앉았다가 다시 날아올랐다를 반복한다.
"아우, 창문 내리니까 좀 보이네."
앞유리에 가득 낀 성에가 이제야 조금 날아가며 시야가 확보된다.
"그런데. 눈이 다가 아닌 거 같은데."
눈 때문이라기엔, 눈앞의 모든 것이 뿌옇다.
앞도. 옆도. 뒤도.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혼자 잘도 흥얼댄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더니 전조등을 켰음에도 한 치 앞을 보기 힘들다.
시속은 이미 10에서 15 사이만 왔다 갔다 하고, 앞에도 뒤에도 차가 있는지 없는지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토끼가... 산에서 잡아먹히던가.
나 혼자 세상과 동 떨어진 기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앞유리가 온통 뿌예진 채 다시 투명하게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아 미치겠네.
길치에다가 차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는 여자가 차를 몰고 지방까지 나왔다.
업보냐.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맞지도 않는 노래를 흘려 부르다가 이대로 가다간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터널 입구에 처박힐지 알 수가 없을 거란 생각까지 미치자 훅 소름이 돋는다.
-죽기 전에 보고 싶은 사람 있어?
"개 똥 같은 생각하고 있다."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연다.
다행히 배터리는 완충이다.
-아, 누구한테 물어보지.
한참 아래까지 내려야 나오는 마지막 문자
+앞으로 사적인 연락 자제하겠습니다+
아몰라.
한 치 앞도 모르겠는 상황에.
뭘 계산해.
번호를 누른다.
이름이 뜬다.
'김시준 차장_ㅈㅈ협회'
신호음이 길어진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