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는 위험해

by 아는개산책


주점


눈을 감는다.

눈을 뜬다.


한 사람을 생각하며 백번을 눈을 떴다 감으면 그리운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칠십칠

칠십팔...


'내 처지에 뭔 놈의 연애냐. 하루 먹고살기도 바쁘다.' 도진은 멋쩍게 말하며 헬멧을 쓴 내 머리 위를 잡고 흔들었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넌 연애하려고 대학 왔냐.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래. 그렇다.

어쩔래.


난 꼭 대학 가서 연애할 거라고 입에 달고 살았다.

첫사랑, 첫 연애는 곧 결혼.

대학 가면 헤어질 수도 있는 연애를 고등학생때 하고 싶진 않았다.


나무토막을 잘라 겉만 대충 다듬어 얹은 듯한 목조 테이블을 유진과 희선이 그리고 총여의 보리와 한영선배가 둘러앉았다.

한우리라고 쓰여있는 작은 팻말. 그 뒤엔 주인 할머니가 편한 자세로 더 편해 보이는 고양이를 안은채 반쯤 졸고 있다.


"서라는, 아직도 다리가 많이 안 좋아? 허구한 날 김도진 출동?"

푸른색 소주병들 사이로 말을 꺼낸 한영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도진은 주점에 다 와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나만 혼자 들여보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오토바이를 멍하니 보다가 마침 문 앞에 나온 유진에게 이끌려 그대로 주점에 들어왔었다.


"동기잖아요."

보리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동기가 뭐?


옆 무리에서 떠들던 상우가 흥미로운 말이라도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말을 보탠다.

"걔는 발발이야. 여기저기 하는게 많으니까 발목이 안 낫지."


킥 하는 웃음소리가 유진의 입에서 먼저 터지는 걸 보고 나도 입꼬리를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눈치를 보던 유진이 바로 다른 말을 하기 전까지.


"언니, 곧 고백한대요."

나는 바로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봤고, 눈이 마주친 유진은 미소를 띠며 눈썹을 두 번 올렸다 내린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 도진이 제대할 때까지 기다렸네. 또 동연 총여 커플나오는거야?"

한영의 무심한 말이 작은 가슴에 기름을 부었다.


나는 다시 소주잔을 들었다.


한잔.

두 잔.

석...


쉬자.


그 뒤로도 둘이 사귀네 마네, 누구랑 누가 커플이네 하는 또 나만 몰랐던 사랑이야기가 주제로 떠올랐다. 말은 이어지는데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냥.

보고 싶은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구십칠...

구십...팔.


도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올라간다.

두 손으로 잡아 내렸다.


도진의 등 뒤에서 서라가 얼굴을 내밀며 두 손을 흔든다.


동기사랑. 나라사랑은.

개뿔...



고백


3차 가자, 3차. 곳곳에서 작은 외침처럼 떠드는 소리에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다리가 풀려있다.


하나 둘 빠져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도진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고우리! 뭐 해, 일어나."


나한테만 안 다정해.


도진이 다가와서 한쪽 팔을 잡아올린다.


"너 언제 술을 이렇게 마셨냐. 정신 차려 이놈아."


나는 살짝 팔을 뿌리쳤다.

세게는 못하겠다.


"오빠가. 왜. 요."


에엥? 하는 도진의 말이 들렸지만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비틀비틀 문 밖으로 걸어갔다.


속이 답답하다.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쳤다.


"오빠가 세게 함 때려줘?"

어느새 뒤쫓아 온 도진이 허리를 숙이고 땅에 곧 붙으려고 하는 내 얼굴을 빤히 본다.


"속이... 속이 안 좋아. 으윽."


이미 두 다리도 내 것이 아니다.

흔들흔들 허니 내 땅에 설까 남의 땅에 설까 한다.


도진이 손바닥으로 등을 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몇 발짝 움직이다가 그대로 멈췄다.


"야, 살짝 쳤는데 어디까지 가."


나는 다시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도진이 허공에서 흐느적대는 내 손을 잡고 눈앞로 선다.


"꼬맹, 입 벌려봐."


고개를 저었다.


"아, 빨리 벌려봐."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가 입을 벌렸다.


큰소리로,

"아-"


치과에서 의사에게 보여주듯이.

눈을 감고 입을 크게.


별안간 도진의 손가락 하나가 입 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악, 뭐야.


"우웩-"


동시에.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속은 비고

머리도 빈다.


이제 괜찮아? 하며 등을 쓰는 도진의 팔을 불쑥 잡았다. 그리고 몸 앞으로 당겼다.

"너 뭐 해"

도진은 놀라면서도 내 앞에 섰다.


긴 속눈썹 사이로 나를 내려다본다.


한 팔을 천천히 들어 도진의 볼 한쪽. 또 남은 팔을 들어 남은 볼 한쪽을 잡았다.

두 손에 힘을 주고 얼굴 앞으로 바짝 당겼다.

숨결이 닿을만큼.


"너 이씨, 토 냄새."


도진의 말에 주변에서 뭐야, 쟤네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상관없다.


손바닥을 세로로 든 정도의 사이를 두고 두 얼굴이 마주 본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린다.


내 눈은 제대로 떠 있을까.

눈 크기가 걱정됐다.


"야, 꼬매ㅇ..."


한번 더 힘을 줬다.

도진의 입술이 오자 모양이 됐다.


"못..겼... 우어억."


남은 것들이

더 있었다.


아주.

많이.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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