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그가 말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포위되는 거라고
콜라를 사 먹는 일이 드뭅니다.
그러다 일 년에 한두 번 편의점에서 무심코 콜라 한 캔을 집어들 때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지인을 만나러 부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 새벽 두 시. 급작스런 복통이 찾아왔습니다. 통증이 멈추지 않아 기어이 자리에 쓰러지고야 말았습니다. 곧 앰뷸런스가 바닥에 웅크린 몸을 실어갔습니다.
창백한 몸이 되었습니다. 응급실에선 충수염이나 급성위경련 등을 의심하였지만 적확한 진단명을 찾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하여 수액 하나를 맞고 아침 7시에 퇴원했습니다.
통증으로 한숨도 잠들지 못한 탓에 꽤 피로했습니다만 아침 9시 비행기라 서둘러 김해공항행 택시를 탔습니다. 하필 공휴일 연휴가 낀 탓에 차가 꽤 막혔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공항 터미널로 급하게 뛰었지만, 항공사 데스크에선 이미 이륙 준비가 끝났다 하여 다음 편 비행기 좌석이 나오면 연락을 주겠다 했습니다. 탑승객이 많아 장담을 못한다면서요.
말미암아 서울에서의 점심 약속도 펑크 나고 말았습니다. 공항에서 길을 잃은 채 한참을 무심히 앉아 있었습니다. 다시 배가 아파왔습니다.
그날 편의점에서 콜라를 샀습니다.
얼마 전엔 울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허나 버스 파업으로 예정된 시간보다 한참을 늦게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출발 5분 전. 혼신의 힘을 다해 부리나케 달렸습니다만 기차는 나를 누락시키고 다음 역으로 달려 나가고야 말았습니다.
규칙 위배한 열외자가 된 기분이 들어 전 다시 콜라를 샀습니다. 뚜껑을 따고 한 참을 벌컥여 봅니다. 그리 광부처럼 가슴속 때 묻은 갈증 샤워합니다.
콜라를 마시는 것은, 내 몸에 가득한 허무와 피로를 허파와 눈동자 뒤흔드는 폭력적 탄산으로 망각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콜라는 자책감에 휘두르는 채찍 같은 용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통증과 쾌감 사이에서 편리하게 내 후회 책임지려는 나약한 조치겠습니다.
우린 매일을 시간과 싸워냅니다. 10분 전이면 불안해지고요.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계단으로 에스컬레이터 왼 편으로 박차 오릅니다. 자리에 앉아 숨을 가다듬다 보면, 도대체 언제 억지로 뛰는 일에 은퇴할 수 있을까 자못 탄식해 봅니다.
인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신을 향해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을 때가 많았고요. 당신 또한 이미 늦게 내게 올 때가 많았습니다.
내가 콜라를 마실 때, 당신은 벌써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법하고요. 내 미련은 울음 대신 콜라로 늦어버린 뜨거운 땀을 묵묵히 식혀낼 뿐입니다.
우리의 도착예정시간이 불안합니다.
교통사정도 내 맘 같지 않고 밤새 복통에 시달리다 당신을 놓친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당신에 이를까 지시등도 지도도 없이 달리다 한 세월 동내고야 맙니다.
언제 사랑에, 출근에, 약속에, 우정에 억지로 뛰어다니는 일 은퇴하게 될까요.
시간은 폭력입니다. 사실 시간이란 우리가 자궁에서 잉태한 이래 하늘 위 천사와 체결한 불공정약관이겠습니다. 생을 주셨으니 그것만은 감사하지만 무뚝뚝한 시간을 정해두신 계약서의 명령이 매섭습니다. 시간은 저 멀리에서 대지를 울리며 처벅처벅 걸어옵니다. 바삭바삭이라거나 앙금앙금 걸어오는 시간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독재에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지구의 중력은 공평하니 우린 순서가 오는대로 오해와 슬픔을 겪고 사랑을 헤쳐나가야 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해있겠습니다.
자주 시간을 돌려보는 꿈을 꿉니다. 되돌려 당신을 다시 만나는 꿈입니다. 이랬으면 더 좋았을까. 그 말을 했었어야지.
삶에 진실된다는 일은 곧 박정한 시간을 통해 실용적 세상에 접속되는 일이겠습니다. 우린 또 다른 희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그 만남은 <결코 지난 시간 돌아보지 마소서>라고 외치는 하나의 결단과 같겠습니다. 그렇게 불안을 머금고 두 번째의 사랑, 세 번째의 사랑을 이어갑니다.
진즉 알았으면 좋았건만, 읊조리면서.
그렇게 세상은 운으로 파도치는 예술입니다. 시간이란 약관 하에 백 프로의 완벽한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을 텝니다. 지속가능한 행운이 없는 이치입니다.
이 재미없는 세상, 한 번씩 콜라라도 사 보는 것이 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