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 거꾸로 매달린 순교를 그리다

명작을 찾아 이탈리아를 뒤지다

by 다두



Crucifixion of St. Peter - Guido Reni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Crucifixion of Saint Peter)은 1604–1605년 귀도 레니가 305 × 171 cm 크기의 패널에 유화로 그렸다. 현재 바티칸 미술관에 있다.


작품은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묶이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화면 중심에는 발이 하늘로 향하고 머리가 땅을 향한 채 고정된 베드로가 배치되어 순교의 겸손함을 드러내고 있다.


십자가는 세 명의 집행인에 의해 세워지고 있다. 한 명은 십자가를 아래에서 받쳐 올리고, 다른 두 명은 베드로의 발을 묶거나 못을 박는 등 힘겨운 작업을 거침없이 수행한다.


몸을 구부려 십자가를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리는 오른쪽 집행인은 다른 두 명과는 뭔가 달리 보인다. 그는 일반 노동자나 부역자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그의 어깨나 종아리의 근육으로 봐서는 십자가를 밀어 올리는 일에 그리 능숙해 보이지 않는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힘겨워하는 모습에서 사건의 긴장감과 긴박감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다.


왼쪽의 집행인은 밧줄을 당겨 베드로의 발목을 십자가에 고정하고 있다. 통통하고 땅딸한 듯한 체형은 요령에 능한 고참의 솜씨인 듯 능숙하게 보인다.


중앙 상단의 망치와 못을 든 집행인은 베드로의 발목에 못을 박을 채비를 하고 있다. 그는 직접 처형의 행위를 집행하는 이가 분명해 보인다. 베드로의 발목이 완전히 십자가에 묶이고 십자가가 곳곳이 세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두운 배경에서 멀리 보이는 석양의 하늘과 스산하게 흔들거리는 듯한 나뭇가지는 베드로의 십자가형이 장엄한 의식이라기보다는 음모적 사건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쓸쓸하고 음침한 분위기는 처형이라는 비극의 장면을 더 무겁고 아프게 한다.


이 작품은 얼른 보아서는 카라바지오가 그린 것으로 생각할 만큼 명암의 대비가 선명하다. 어두운 배경과 인물에게만 집중되는 강한 빛은 카라바지오의 작품 이상으로 역동적이고 연극적이다.


그러나 레니의 작품을 세세히 따져 보면 카라바지오보다는 훨씬 정제되고 덜 현실적이다. 카라바지오보다는 덜 세속적이고 덜 사실적이어서 더 고요하고 더 숭고하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Simon)이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로 살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안드레아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스승 요한이 지나가는 예수를 가리키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뒤따라가 하루를 함께 보낸 후 이 사람이 ’ 바로 그 메시아다 ‘라고 확신했다.


안드레아는 형 시몬을 예수께 데려갔다. 예수는 시몬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너 요한의 아들 시몬은 장차 게바(베드로-반석)라 하리라.”베드로의 신앙적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었다.


어느 날 시몬이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지쳐 있을 때 예수는 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충고했다. 시몬이 예수의 말대로 다시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다. 시몬은 예수의 권능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첫 번째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예수는 “이제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라고 응답하였다.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는 순간이자 사도로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베드로는 변화산 사건이나 수난 예고를 통해 예수의 기적과 가르침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사도 중의 사도로 성숙해 갔다.


변화산 사건(Transfiguration)이란 예수가 산 위에서 빛나는 신적 모습으로 변화한 사건을 말한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가 한순간에 신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이 순간에,“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신하고 감격했다.


예수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미래를 세 번에 걸쳐 제자들에게 미리 말하였다.


첫 번째 수난 예고는 유대 지역의 북쪽 끝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행해졌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의 살아계신 아들이십니다.” 변화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베드로의 진솔한 신앙고백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베드로야. 네가 그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게 되리라.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로서 교회의 권위를 부여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어서 예수는 “나는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유대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첫 번째 수난 예고였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잡고 “주여,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직전의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예고를 믿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즉시 베드로를 꾸짖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아직 믿음이 부족한 베드로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베드로는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사도의 길을 걷기로 재차 다짐했다.


예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는 갈릴리 지역을 지나가던 중에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첫 번째 예고에서 말한 수난의 방식을 보다 구체적으로(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한다) 언급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당장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들은 섣불리 뭐라고 대꾸했다가는 베드로와 같이 사탄이라고 꾸중을 들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또한 자신들도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까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드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곧이어 예수는 “나는 죽으러 간다.”라고 말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을 내디뎠다. 제자들은 예수를 좇아 나서며 “이제 우리 중 누가 더 높은 자인가?”라고 서로에게 따져 물었다. 예수가 죽기 전에 이를 결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예수의 수난보다는 각자의 지위를 더 고민하고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을 돌아보고 이렇게 정하였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세 번째 수난 예고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있었다.


제자들을 앞서 빠르고 결연하게 걸어가던 예수가 걸음을 멈추고 제자들을 조용히 불러 세웠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그를 사형에 넘기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그는 살아날 것이다.”수난의 과정과 방법을 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이에 야고보와 요한이 조용히 예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주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 중 하나를 오른편에, 다른 하나를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제자들 중 베드로와 함께 변화산의 계시를 목격한 야고보와 요한마저도 여전히 자신의 지위에 목매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말하였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구나.”“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야고보와 요한은 얼른 대답했다. “예,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이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후에도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정하였다.


예수가 체포된 뒤 베드로는 멀찍이서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뜰까지 들어갔다. 그곳에서 불을 쬐던 하녀 중 한 사람이 베드로를 유심히 쳐다보다 “당신도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라고 불쑥 물었다.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답했다. “나는 그를 모른다.” 제사장이나 관리의 심문도 아닌 하녀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도 체포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자신과 예수를 모두 부정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베드로를 주목해 온 다른 이들이 이렇게 다그쳤다. “당신은 그 사람의 제자가 맞지 않는가."


베드로는 더욱 강하게 부정했다. “나는 아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또 다른 사람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베드로를 추궁했다. “당신은 갈릴리 사람이잖아. 말투만 들어도 알겠는데? 당신은 분명히 그 사람과 함께 있었어!”


베드로는 극도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나는 그 사람을 전혀 모른다!”라고 더 강하게 부정했다.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에야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얘수가 부활한 후 베드로는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를 세우고 천국의 열쇠가 상징하는 하늘의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며 예루살렘의 지하 교회를 이끄는 기독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는 후에 기독교 역사에서 초대 교황이라는 직위로 기록되게 되었다. (교황이라는 칭호와 제도는 베드로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11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공식화되었다.)


훗날 교황청은 베드로의 천국의 열쇠를 교회와 교황의 권위의 상징으로서 교황의 문장에 새겨 넣었다. 아직까지도 교황의 문장에는 금색(하늘의 권위)과 은색(땅에서의 권위) 두 개의 열쇠가 교차되어 새겨져 있다.


기록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베드로는 예수가 승천한 이후인 33년경에서 64-67년경 로마의 황제 네로에 의해 순교할 때까지 약 25년간 초대 교황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간주한다.


70-90년 경 루카에 의해 쓰인 사도행전에는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가 48-50년 경 기도교사에서는 최초의 공의회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회의’를 주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회의는 그간 기독교(지하 교회)가 유대교의 한 분파처럼 여겨진 외관상의 교의를 혁신하여 기독교가 하나의 보편적 종교로서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논의된 핵심 주제는 “이방인(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기독교인이 되어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 율법(특히 할례)을 지켜야 하는가?”였다.


회의에서 베드로는 “하느님이 이미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다”라고 증언하고, 바울도 이방인 선교의 경험을 보고하고 이를 입증해 보였다.


회의는, 유대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 더 이상 기독교인이 될 전제 조건이 아니라고 정의했다.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또한 할례 등 유대 율법과는 무관한 사람도 이제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보편적 교리가 정립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베드로가 로마로 가게 된 시기와 과정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베드로의 로마 선교에 결정적인 배경이 된 것으로는 스테파노의 순교 사건을 지목하고 있다.


스테파노는 헬라파 유대인 출신이었으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이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행위로, 산헤드린(유대 지도자 공회)은 그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이고 말았다.


스테파노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보다 박해를 받게 되었으나, 이러한 박해는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보다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베드로도 순교 사건의 여파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아예 활동의 무대를 제국의 중심이며 세상의 중심인 로마로 옮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64년 로마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화재가 발생하고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네로 황제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기독교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구금 처형 작전을 전개토록 했다. 로마 교회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던 베드로도 체포를 면치 못하고 붙잡혀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매달릴 자격이 없으니 거꾸로 매어 달라.”순교자로서의 용기와 겸손의 선언이었다.


베드로의 처형은 바티칸 언덕에서 집행되고 그곳에 묻혔다. 훗날 교회는 그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세우고 교황령과 교황청의 중심지로 삼아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귀도 레니는 1575년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나름 유명한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레니도 어린 시절 음악적 감수성이 뛰어났으나 이보다 더 미술에 비범한 재능을 보여 볼로냐의 명문 화가 집안인 카라치 형제의 미술원(Academy of the Carracci)에 입학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Crucifixion of Saint Peter - Caravaggio



1590년대 말 레니는 미술의 중심지인 로마로 진출했다.


당시 로마는 카라바지오의 극적인 명암 기법이 화단을 주도하고 있었다. 레니는 카라바지오의 명암 기법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지나친 사실성과 폭발적인 감정 표현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카라바지오의 명암법을 사용하면서도 카라치 화파에서 배운 고전적 균형과 절제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1604–1605년 그는 로마의 강력한 가문이자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친척인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Pietro Aldobrandini) 추기경으로부터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을 의뢰받았다. 이는 그가 로마에서 의뢰받은 첫 번째 공식 작품이었다.


알도브란디니 가문은 로마에서 자신들의 권력과 신앙적 정당성을 과시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 성 베드로의 순교 장면처럼 교황권과 직결되는 주제의 그림을 가지고 싶었다.


사실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은 이미 카라비지오를 후원하며 여러 작품을 의뢰했었다. 카라바지오는 이미 같은 주제의 같은 제목인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을 제작하여 로마 교회로부터 큰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은 카라비지오가 아닌 레니에게 이를 의뢰한 것이다. 그는 카라바지오보다는 더 고전적이고 성스러운 느낌의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을 원했던 것이다.


레니의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은 알도브란디니 가문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작품은 가문의 예배당을 성스럽게 장식했다.


레니는 말년에 로마의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세속적인 화풍에 싫증을 느껴 고향 볼로냐로 돌아갔다.


귀향 후 그가 그린〈아틀라스〉, 〈성 세바스티아노>, 〈아우로라(Aurora)〉, <성모승천> 등은 더욱 부드럽고 은빛(silvery)의 천상의 미를 표현하여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레니는 생전에 유럽에서 가장 비싼 작품을 그리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1642년 볼로냐에서 사망했다.



The Assumption of Virgin Mary - Guido Reni



19세기 교황 비오 7세가 유수의 미술품들을 수집하여 바티칸 미술관을 정비할 때, 알도브란디니 가문은 레니의 작품들을 바티칸으로 이관하였다.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속에는 미완의 제자로 출발하여 교회의 기초와 권위를 세우고, 끝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겸손하게 순교한 한 완성된 신앙인의 참된 용기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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