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꽃, 자연
묵직한 구름과 가늘게 흩어지는 비로 물속에 잠겨있는 듯 침잠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나는 내내 흐린 바다를 잊지 못하고 있다. 책을 읽다가도 산을 오르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그날의 바다가 생각난다. 평범한 바다였다. 높지 않은 작은 산을 하나 넘어 포근히 들어앉은 해안이었다.
바다로 이어지는 좁은 숲길에는 물이 찰방찰방 흘러내렸다. 바다에서 스며든 물인지 바다로 가는 어린 빗물인지 알 수 없었다. 발목을 적셨으면 좋았으련만 그때엔 흔들리는 디딤돌을 피해 발을 딛느라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조그마한 검푸른 재색 게가 바위 아래로 숨어들었다. 흐르던 물이 간데없이 사라지자 몽돌해안 저 앞으로 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굵은 몽돌과 부드러운 파도가 차그락차그락 낮은 소리를 냈다. 바다는 고요했다.
그날의 바다엔 햇살이 있었다. 멀리 검은 새들이 날았고 배들이 섬처럼 떠있었다. 기어 다니는 바다 벌레들이 보였으나 모른척했다. 카페의 구석처럼 나무에 가려진 산자락처럼 숨을 곳이 있는 바다였다. 나만의 세상에 몰래 숨어든 기분이었다. 그렇게 산에 기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보이지 않는 구름에 갇힌 어설픈 일몰이 있었다. 어둠이 몰려들기 전에 바다를 떠났다. 숲에 어둠이 내렸다. 짙어지는 어둠 속을 걸었다. 산 아래 산업 단지엔 하얀 불빛이 반짝였다.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동이 트기 전 어둠 속에서 바닷길이 열렸고 물기가 마르지 않은 바다를 걸어 암자 한 채가 전부인 작은 섬으로 들어갔다. 새벽바람이 차가웠으나 두텁고 어두운 구름장 아래로 빨간 등대가 사평역의 톱밥 난로처럼 따뜻했다.
갈매기와 기러기들이 날았고 목이 긴 하얀 새들도 날았다. 목이 긴 새는 날 때면 머리와 다리가 늘 헷갈려 나아가는 방향으로 가늠하곤 했다. 바람이 불었으나 구름을 걷어내지는 못했다. 산 위로 해가 나올듯하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조금 아주 조금만 더 기다리면 구름을 찢고 해가 나타날 것을 알았다. 포기하기에는 이르다는 것, 그것은 경험에서 온 것이었다. 손톱 크기의 해가 붉었다. 점점 주위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동그란 해를 보았다.
바다 위에 붉은 길이 하나 만들어졌고, 나는 그 위를 걸었다. 어설픈 일출이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온전한 일몰 혹은 일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미리 포기하지 않으면 기대했던 것과 다를지라도 모든 생의 경이 앞에 설 수 있다. 그날의 신비는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슴푸레했던 바다가 환해졌다. 그새 바닷길은 더 넓어지고 물기가 말라 바다에 묻혔던 흔적을 지워 놓았다. 언젠가 지워질 기억처럼. 나는 바다를 건넜다.
짙푸른 바다가 호기롭게 열리는 풍경이 다가들 때면 "바다다!" 외치는 순간을 사랑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내게 발 딛지 못하는 허방이었다. 발 딛지 못해 아슴한 그곳, 먼 동경의 땅, 바다. 바다를 밟았다.
- 서산 황금산 해안과 간월도에서
*사평역의 톱밥 난로처럼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생각하며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