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어려서 공부에 취미가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승덕 오빠와 오빠의 뒷바라지를 하는 엄마의 뒷바라지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도 친구들처럼 고등학교까진 마쳤을 거로 생각했다.
오빠는 공부에 재능이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빠는 또래보다 말이 느렸고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툭하면 울었고 편식이 심했고 잔병치레가 잦았고 늘 어딘가 다쳐있었다.
물론 그런 아이 중에도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고난 경우가 있지만, 오빠는 아니었다.
주변에선 야망은커녕 용기도 의욕도 없고 심약하며 게으르기까지 한 오빠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지만, 엄마만은 예외였다.
춘자는 아들 승덕의 인생이 훤히 내다보였다. 장차 서울에서 일류대학을 졸업할 아들을 큰 회사들이 서로 데려가려 싸울 것이다. 부잣집 딸내미들은 아파트 열쇠에 자동차 열쇠까지 챙겨와 혼인해 달라 매달릴 것이다. 세상천지에 가족밖에 모르는 아들은 제 엄마와 동생부터 챙기겠지. 그 순리를 따르고자 춘자는 중학교에 올라가는 아들을 서울 시누이 집으로 보냈다.
시누이와 사이가 원만했던 건 아니다. 승덕 아빠 장례식장에서 시누이는 춘자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며 패악을 부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시누이는 그럭저럭 누그러졌고, 다행히 조카 아들만큼은 꽤 애틋해 했다. 서울에서 3층짜리 단독주택에 살던 그녀는 승덕에게 옥탑방을 내주었다.
그건 고마운데, 걸핏하면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조카가 차지한 옥탑방이 볕이 잘 들고 화장실까지 딸려있어 정식으로 세를 놓았다면 다달이 사십만 원씩은 받았을 거라고 춘자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다.
춘자는, 아이고 치사스러워, 그깟 사십만 원 내고 말지.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아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았다. 등록금, 책값, 교통비, 교복, 외출복, 속옷, 신발, 이발비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을 만큼의 용돈까지. 그 전부를 파출부 수당과 텃밭에서 난 채소를 팔아 번 돈으로는 감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부디 시누이가 방세를 계속해서 묵인해주길, 한창 먹을 나이인 승덕에게 풍족한 음식을 제공해주길, 간혹 용돈도 두둑이 쥐여주길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춘자에게 최선은, 자신이 시누이에게 입은 어마어마한 은혜를 한시도 잊지 않고 있으며, 그에 보답하고자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종일 몸이 문드러지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춘자는 쪽잠을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음식을 만들었다. 입 짧은 아들이 그나마 씹어 삼키는 소고기 장조림이며 사골국 등이 서울로 올라갔다.
언제부턴가 시누이는 간장게장이나 갓김치 등을 보내 달라 전화로 주문했다. 승덕은 입에도 대지 않는 음식들이었지만, 시누이의 주문에 토를 달아 금쪽같은 아들이 눈치 볼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영은 그런 엄마가 측은했고 답답했다. 그리고 배가 고팠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상자 제조공장에 취직했다.
공장에서 또래들과 어울려 상자를 접고 나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박봉을 받으며 고된 몇 개월을 견뎌내면 알토란 같은 목돈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종잣돈이 모이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돈 나갈 일이 터졌다.
오빠가 서울에서 삼수하는 동안의 생활비라든가,
마침내 서울 H 대학에 들어간 오빠의 4년 치 등록금이라든가,
오빠가 막 학기를 휴학하고 하와이로 어학연수를 간 비용이라든가,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 공부를 시작한 오빠의 당시 여자친구가 임신한 몸으로 영의 자취방에서 수개월을 지내다 중절 수술을 받기까지의 비용 일체라든가,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병원에 입원한 오빠의 치료비 등이었다.
오빠가 별다른 사건을 터뜨리지 않아 살만하다 싶을 땐 공장이 문을 닫았다. 그 후로 영은 주유소, 빌딩 주차장,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운 좋게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순두붓집에 취직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