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어시스턴트 (5) 서른넷에 첫 연애

by 노동자a

순두붓집은 수용인원 삼백 명 규모에 주차장까지 딸린 대형 식당이었다.

동료 대부분이 가정이 있는 엄마들로 생활력이 엄청났다. 그녀들의 영향으로 영도 열심히 돈을 모았고, 사 년 만에 반지하에서 탈출해, 큼직한 창문으로 햇살이 담뿍 쏟아지는 2층 원룸도 얻을 수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과 멀쩡한 집, 그 삶을 완벽하게 만든 건 나이 서른넷에 시작한 첫 연애였다.


순두붓집 배달부였던 병호는 허우대가 번듯한 남자였다. 그는 쉬는 시간이면 영을 밖으로 불러내 아이스크림을 사 주곤 했다. 영의 서른여섯 번째 생일에 둘은 월차를 맞춰내고 교외로 데이트를 하러 갔다. 손을 꼭 잡고 공원을 거닐다 병호가 말했다.


“이 년만 더 고생하자. 내가 방 얻을 돈만 모으면 식 올려.”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인 영은 그 밤 병호를 원룸으로 데려갔다. 그리곤 문갑에서 통장을 꺼내 내밀었다.


“꿈같은 행복을 이 년이나 미룰 필요 있어요? 이 돈이면 작은 신혼 방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병호는 한참 동안 통장을 들여다보다가 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우선 이걸로 시작하자. 결혼하면 당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ai-generated-9306969_1280.jpg


그 믿을 수 없는 달콤함의 유효기한은 그러나 고작 이 주에 불과했다.

이 주가 지난 토요일, 비번이었던 영이 늦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현관을 쾅쾅 두드렸다. 위층에 사는 주인아주머니였다.


“새댁, 여태 짐도 안 빼고 뭐 해?”

“짐을 왜 빼요?”

“왜 빼긴. 오후에 이사 들어오니까 빼지. 그 집 신랑이 하도 사정해서 보증금 빼주고도 이사 나갈 말미를 일주일이나 줬는데, 여태 방을 차지하고 있으면 어째?"

"……."

"세입자라고 앓는 소리 하는데, 나야말로 월세 받아 생활하는 사람이야. 방을 일주일이나 무상으로 내줬으면 손해가 막심하다고."

"……."

"그나저나 요즘 젊은이들은 곱게 자라 그런가 버릇없네. 어쩜 죄송하단 말 한마디를 안 해?"

"……."

"새댁, 내 말 듣고 있어?”


영은 잠옷 바람으로 은행에 달려갔다. 통장 잔액이 텅 비어있었다.

다음엔 순두붓집으로 갔다. 사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경찰서에 갔다. 경찰은 병호가 전과 7범이라고 했다.


woman-6203288_1280.jpg


영이 시골 엄마 집으로 내려갔을 때, 그곳엔 승덕 오빠 내외가 먼저 와 있었다. 오빠는 안방 아랫목에 누워 온종일 화를 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욕지거리엔 그가 겪은 일들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고시 공부를 중단한 승덕은 서울에 있는 한 자동차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내성적이고 마음 여린 자신이 영업사원이라니. 실적은 최하위였고 상사의 질책과 팀원들의 눈총이 당연하게 이어졌다.

게다가 그것이 결코 승덕을 인간적으로 무시하려 의도된 말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불특정 다수의 고객이 던지는 ‘다정하지 못한 말’에 승덕은 깊은 내상을 입고 있었다.

쌓이고 곪은 분노는 팀 회식 자리에서 한꺼번에 폭발했다. 그는 상사의 가슴팍에 소주잔을 집어 던지며 울부짖었다.


“나한테 어쩌라고 지랄들이야, 지랄들이! 못하는 걸 시켜놓고 어떻게 잘하기를 바라냐고오!”


이튿날 맨정신으로 돌아온 승덕은 상사의 발아래 무릎 꿇고 해고만은 시키지 말아 달라 눈물로 읍소했다. 상사가 승덕의 뺨을 여러 차례 후려쳤다. 며칠 후 승덕은 자동차 조립 공장으로 발령받았다.


공장 근로자들은 대졸에 영업사원 출신인 승덕을 대놓고 따돌렸다. 그러나 그편이 승덕에겐 오히려 마음 편했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일하면서 그는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공장 경리 미옥과 연애를 했고 석 달 뒤엔 혼인신고까지 마쳤다.


평화롭던 일상에 ‘그날’이 들어있었다. 공장에서 족구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전 근무를 마친 근로자들은 하나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앞마당으로 나갔다.

그러나 승덕은 잔업이 있는 모양새로 기계 근처를 얼쩡댔다.

족구 대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눈치를 살피던 중이었는데, 그러다 그만 주변에 소홀하고 말았다.

느닷없이 귀청을 찢는듯한 굉음이 들리더니 끔찍한 고통이 이어졌다.


"으아아아악!"


동료들이 하나둘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구급차도 왔다. 구급대원의 손길이 거칠었다.

월요일 연재
이전 09화영 어시스턴트 (4) 배가 고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