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옥은 남편 승덕이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동안 묵묵히 곁을 지켰고, 남편을 따라 시골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식당 주방일, 빌딩 청소일, 파출부 등 가리지 않고 일하며 생계를 짊어졌다.
그러나 그토록 헌신적이고 강단이 있던 여인도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남편의 폭언과 원망에는 두 무릎을 꿇었다.
집 나가는 미옥을 큰길까지 배웅한 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안방으로 쳐들어갔다.
오빠는 안방 아랫목에 누워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영은 엄마와 자신의 인생을 자근자근 밟은 것으로도 모자라 미옥의 인생까지 주물러 터뜨려놓고도 제대로 서지 못하는 오빠의 현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빠, 자?”
승덕은 대답이 없었다. 그가 덮어쓴 이불의 가슴께가 살포시 오르락내리락했다.
“안 자는 거 알아. 일어나봐.”
승덕은 꼼짝하지 않았다. 영은 부아가 치밀었다.
“오빠는 왜 사과를 안 해?”
“내가 누구한테, 뭘, 왜 사과하는데?”
승덕이 이불을 홱 걷고 영을 노려보았다.
“거봐. 깨어 있었지. 알고 있었다니까.”
영이 피식 비웃자 승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아직 멀쩡한 한쪽 다리와 한쪽 팔에 힘을 줘 발딱 일어나 앉았다. 그러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소주병을 영에게 집어 던졌다.
영이 가볍게 몸을 피했다.
“나랑 엄마가 그만큼 뒷바라지했으면 출세해서 은혜를 갚아야지, 웬 병신? 그래 놓고 뭘 잘했다고 미옥 언니까지 내쫓아? 우리한테 왜 사과를 안 하는데?”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영을 죽일 듯이 쏘아보던 승덕은 몸을 질질 끌며 창문까지 기어갔다.
고작 이 미터쯤 움직였을 뿐인데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댔다.
가까스로 창문에 도달한 그는 한쪽 팔과 턱을 이용해 비스듬히 세워둔 목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잡고 목표물을 겨냥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온 정신을 집중해 이때다 싶은 순간, 있는 힘껏 목발을 날렸다.
"아악!"
명중이었다.
영이 방구석에 나동그라졌다.
승덕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쓰!"
그날 이후 승덕은 다소 활력을 찾았지만, 영과의 냉전은 여전했다.
영도 아쉬운 바는 없었지만, 엄마가 일을 나가고 미옥 언니도 없는 집에서 말벗이 없어 심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다나 떨 생각으로 들른 직업소개소에서 서울에 일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숙식 제공, 미용 교육, 자격증 취득 시 어시스턴트로 승진도 가능하다고 했다.
영은 즉시 서울로 올라갔다.
달래 미용실은 규모는 작지만, 단골 수는 상당했다.
사장 대수의 서글서글한 성격, 미용사 달래의 살뜰한 서비스에 거품 없는 가격까지. 주민들이 달래 미용실을 애용하는 이유였다.
미용실이 꼬박꼬박 수익을 올리자 대수는 두 번째 사업을 구상했다. 그가 선택한 아이템은 운동화. 타깃 소비자는 미용실의 주 고객층인 중장년 여성들이었다.
그가 운동화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미용실엔 대수를 대신할 보조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영을 고용하게 된 것이다.
달래네는 영에게 미용실에 딸린 쪽방을 제공했다. 세 평이 될까 말까 한 크기의 쪽방은 난방도 되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창문이 하나 있었지만, 햇빛이 들기엔 무리였다.
영은 매일 오전 여덟 시에 일어나 쪽방에 딸린 간이수도에서 세수했다.
화장실은 상가 지하에 있는 공동화장실을 이용했다.
아홉 시쯤 출근하는 달래의 손에 삼단찬합이 들려있었다. 달래와 영의 점심과 저녁 도시락이었다.
영은 매번 저녁 식사를 조금씩 남겨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으로 먹었다.
거기서 영이 하는 일은 청소, 빨래, 설거지 및 잔심부름이었다.
영이 미용실에서 일한 지 삼 개월쯤 지났을 때 대수가 말했다.
“누님, 내일 아침은 우리 집에 와서 드세요.”
그 한마디에 밤잠까지 설친 영은 새벽같이 일어나 약도를 들고 대수네 집으로 향했다.
걸어서 사십 분 만에 도착한 곳은 고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이었다.
서른네 평 아파트는 현관부터 훤했다. 거실 한 가운데 산처럼 쌓인 운동화 상자가 집안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 많은 상자가 놓일 수 있는 널찍한 거실, 방 세 칸, 화장실 두 칸, 주방에 베란다까지, 그야말로 대궐이 따로 없었다.
식탁엔 김치찌개, 계란말이, 멸치 조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달래가 매일 싸 오는 도시락도 맛나지만, 갓 지은 밥과 뜨끈한 찌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영은 주책맞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손윗사람 체면이 아닌 것 같아 꾹 참았다.
식사를 마치자 대수가 운동화 상자를 내밀었다.
“누님, 이거 신으세요. 중장년 여성용 기능성 운동화예요.”
상자엔 감색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있었다.
“이 귀한걸...... 고마워서 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