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빡스 (10)

by 노동자a

두식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뜬금없이 맞은편의 노인을 가리켰다.


"우리 동생은 벤처 1세대잖아. 우리나라 전산망에 이 동생 손 안 간 데가 없어!"

"아휴, 형님은 무슨 그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네같은 초대 개발자들 없었으면 지금 우리나라가 어찌 IT 강국이 됐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이 동생이 이름을 타고 났어. 만원, 정만원. 암튼 이 동생은 교육계까지 헌신했다고!"


상렬은 잽싸게 만원의 이름도 검색해 보았다.

몇 명이 조회되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순간 만원이 갑자기 상렬에게로 손을 뻗었다.

핸드폰을 빼앗으려는 건가 싶어 움찔하는데, 그가 집어간 건 상렬의 무릎에 놓인 소주였다.

말릴새도 없이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그가 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서글서글하던 처음의 이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이 순간만 기다린 듯, 참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 진짜, 회사와 나라를 위해서 청춘을 희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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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은 1990년에서 2000년까지의 인터넷 붐 시대에 활약한 IT기업의 초창기 멤버였다.

카이스트 출신 3명과 대기업 SI출신 개발자 6명이 의기투합해 테헤란로에 그럴듯한 사무실을 꾸렸다.

HTML기반의 초경량 엔진을 개발하여 천리안보다 빠르다는 평을 들었다.

6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전성기에는 120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순항은 짧았고 폭풍우가 몰아쳤다.

2003년 쯤 대형 포털이 생겨났다.

가족같았던 직원들은 대기업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창업멤버간 이권 다툼은 더욱 살벌했다.

만원이 가진 기술은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있었다.


폐업을 마무리한 뒤 그는 사립 실업계 고등학교의 전산과 교사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교사가 된 동료들은 순진했다. 사회에서 구르고 구른 만원에게는 애들처럼 다루기가 쉬웠다. 아니, 사춘기 애들보다 더 간단했다.

회사는 망했지만 호황때 벌어돈 돈이 넉넉해 경계적으로도 딱히 걱정은 없었다.

사회적으로도 교사라는 직업은 자존심을 충분히 챙겨주었다.

고등학생들은 전산의 기초를 배우기 때문에 사회에서 구식이 되어버린 그의 기술도 다시 빛을 발했다.

이론을 설명하다 실무 때의 경험을 조금 얹는 것만으로 학생들이 그를 바라보는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문제는 여고라는 점이었다.

한 여름. 반팔 블라우스를 입은 아이의 팔 좀 쓰다듬은 게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팔을 쓰다듬은 건 아니고... 팔에 난 털을 뽑았다.

세간의 말처럼 성희롱은 아니었다. 나는 그애를 성적으로 희롱할 마음이 없었다. 그냥... 팔에 유독 털이 긴 여자아이들이 있어서 그걸 잡아당기고는 했다. 애들은 웃었던 것 같은데....


학부모들이 찾아왔다.

살다가 그런 망신은 처음 당했다.


"그후로 다른 직장에는 못 들어가겠더라고. 사람에 대한 공포가 생겼나봐. 트라우마지, 뭐."

"그게 언젭니까?"


상렬의 포커스는 여전히 마지막 직장에서 퇴사하고 그 후에 어떻게 살았느냐였다.


"십오년쯤 됐지."

"......!"

"어차피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어. 학교에만 갇혀 있는 것도 답답했고."


상렬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도 저렇게 되는 걸까.

어디서도 재기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곱씹으며 초라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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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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