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장독대가 처연하다

아버지 전 상서

by dropfairy

"호로 호록 호로록", "푸륵 푸득 푸드덕"

장독대 옆 대숲에 날아든 새 한 마리가 수상한 소리를 낸다.


비가 그쳤나 보다.

시골집에서 잠을 자면 새소리가 곧 알람이다.

해가 크게 뜬 날은 일찍 놀러 온 새들의 문안인사가 일상이고 비가 그친 날은 숨죽이며 대기한 새들의 목청이 희한하다.






"추석에 집에 오면 아버지 모시고 가라. 아버지 병원 가셔야겠다."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척추 협착증으로 몇 해 전부터 주사 치료를 받고 있던 허리가 이제 주사로 안 되는 지경이 되었나 보다.


6개월 만에 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조금 달라졌다. 오른쪽 어깨가 밑으로 풀썩 처졌고 걸음도 뒤뚱뒤뚱 아장아장 걸으셨다.






연휴 다음날 서울에 있는 척추전문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일주일 후로 아버지 수술 날이 잡혔다.


입원일까지 5일이 남아 기숙사로 떠난 아들 침대에 아버지를 모셨다. 간동한 아들 방에 가만한 아버지가 가지런히 드러누웠다.


아버지는 저녁 9시쯤 방에 들어가서 새벽 4시 반쯤 일어나신다. 9시에 방 불이 바로 꺼질 때도 있고 책을 읽으시는지 10시까지 빛이 새어 나올 때도 있다.


요즘 등줄기가 젖어 새벽에 자주 깬다. 다듬거리며 시간을 확인하면 대강 4시 반. 거실과 연결된 문틈으로 해사한 불이 빼꼼 기어 온다.


아침 7시 전에 집을 나가서 저녁 7시가 넘어 집에 들어오는 패턴으로는 평일에 아버지랑 밥 한 끼 할 시간이 없다. 아침밥을 먹어야겠다.


물과 과일을 먼저 챙겨드리고 덥힌 즉석밥에 계란프라이를 올려 김치찌개와 전날 주문한 아귀찜, 그리고 조미김 한 봉으로 아침상을 차렸다. 아버지랑 나란히 앉아 반찬을 놓아주며 부지런히 먹고 치우다 싱긋 웃는다.


"아버지, 딸이랑 같이 아침밥 먹으니 좋아?"


"회사 다녀오겠습니다. 재밌게 놀고 계세요."






아버지랑 단 둘이 데이트 한 날



오늘은 아버지가 수술하시는 날이다. 전철을 2번 환승해서 2시간쯤 걸리는 병원으로 출발했다.


출근할 때보다 머리며 화장도 공들여하고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지난 일요일, 비가 긋는 사이 아버지와 강변 드라이브를 갔다. 데이트할 때나 입을 듯한, 숱 장식을 덧댄 물방울 원피스를 입은 딸을 보고 아버지가 "우와"하고 헤벌심 웃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망구가 된 아버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핫한 착장으로 병원에 가야겠다. 푸른 꽃이 프린트된 무릎 위로 살짝 올라가는 하얀색 원피스에 검은색 워커를 신었다. 긴 머리는 가르마를 없애 볼륨을 만들고 화장은 수수하지만 꼼꼼하게 했다. 허리는 벨트를 잘록하게 조여 리본을 길게 묶었다.


대기실에서 뵌 아버지 얼굴이 밤새 까슬해졌다. 저녁에 한숨도 못 주무시고 새벽 5시에 링거를 꽂은 후 금식 중이시란다.


"아빠 딸 이뻐? 아빠한테 이쁘게 보이려고 이러고 왔어. 수술 잘 받고 재활 운동 열심히 해서 증손주까지 보자."


아버지 손을 조물조물, 볼을 쓰담쓰담, 귀를 말랑말랑 비벼대며 "아버지 사랑해."라고 또랑또랑 읊었다.






주렁 지는 낟알이 대롱대롱 맞닿은 논두렁을 헤치며 멧새들이 "포로르륵", "찌이익"


비가 개어 볕뉘 든 주황 감나무에서 직박구리 한 무리가 "주쭉주쭉", "삐욕삐욕삐요옥"


동박새처럼 재잘재잘 지저귀는 딸 앞에서 아버지의 이동식 침대가 시나브로 멀어진다.


40대 중반이 넘어 아버지와 엉겁결 옴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