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주는 기회와 행복
나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모님은 원하는 것은 모두 풍족하게 지원해 주셨지만, 딱 하나 친구들 가정과 차별화된 교육 방침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집안일은 가족 구성원이 나눠서 한다”라는 마인드였다. “성인도 아니고 고등학생인데 집안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커서 성인이 되면 하겠다고 했지만, 통할 리 없었다.
고등학생 때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모든 집안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상 차리기, 정리하기, 빨래 분류하기, 신발 정리하기 등 외에 ‘다림질은 직접 하기’였다. “다림질도 직접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부모님의 의지는 확고했다. 어느 일요일, 독서실에 갔다가 농구를 하고 집에 오니 피곤해서 씻고 바로 잠들었다. 결국 다음 날 주름진 교복 셔츠를 입고 등교했더니 친구들이 놀렸다. 다림질은 당연히 엄마가 해주는 거 아니냐고, 혹시 새엄마냐고도 물었다.
다림질하다 보니 주름도 이상하게 잡히고 다린 곳은 구겨졌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요령’이 생기게 되었다. 어느 시점이 지나자 다림질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집에 오면 샤워하는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운 루틴이 되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나만의 노하우도 생겼다. 한때 옷을 좋아해 비스포크 옷도 종종 즐겨 입었다. 업체 대표님께 홈 드라이클리닝 제품도 추천받아 자주 사용했다. 옷을 세탁할 때는 드라이클리닝(지용성 얼룩), 세탁기(일반 세탁), 홈 드라이클리닝(수용성 얼룩)으로 나눠서 하게 되었다. 특히 맞춤 셔츠를 입다 보면 목이나 소매가 빨리 닳을 수 있다. 그래서 홈 드라이클리닝을 5분간 하고, 탈수는 1분만 하면 옷 마모 없이 빠르게 세탁할 수 있어 좋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모든 집안일을 함께 했다. 분리수거, 설거지, 세탁, 다림질, 요리 등이다. 단, 나는 요리를 못해서 제외되었다. 주말에는 아버지가 종종 요리를 해 주셨다. 아직도 아버지가 해주신 두부 탕수육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부모님께 물었다. “보통 결혼 전까지 같이 살 때는 집안일을 다 해주는 거 아니냐고.” 부모님은 “나중에 결혼해서 맞벌이를 하게 되면, 익숙하지 않은 일은 억지로 잘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을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친구들보다 적극적으로 집안일을 하는 시기가 빨라진 것이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는 늘 아르바이트하느라 바빴던 것 같다. 밤샘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하고, 방학 때 오전에는 커피숍, 오후에는 민들레영토라는 곳에서 일했었다. 이 외에 호프집, 신문 배달, 호텔 등 다양한 경험도 많이 했다.
사실, 민들레영토는 당시 시급이 높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내향형인 내가 사회생활을 하려면 외향형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지원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많이 밝아지고 적극적인 성향으로 변했다.
부족함을 메우고 조금씩 다듬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마음은 20대 때부터였던 것 같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웃긴 에피소드가 있다. 술을 좋아했던 나는 동료들과도 잘 어울리고 사내 동호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어느 날 퇴근 후 동료들과 늦게까지 술 한잔하고 새벽에 귀가했다. 많이 마셔서 얼른 씻고 바로 잠들어야 했지만, 다음 날 입으려고 했던 치노팬츠를 다림질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들었던 것 같다. 결국 샤워하고 치노팬츠를 잘 다리고 잠들었다. 이제 다림질은 무의식 중에 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다음 날 회사에 가서 동료들과 같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주름은 보통 한 줄 잡는데, 두 줄을 이쁘게 잡은 게 아닌가. 취했으니 당연하다. 지금 생각해도 귀여우면서 대견한 내 모습이다. 몸에 체화된 습관이 무의식에 각인되면 이런 경지에 이르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군대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달았다. 작은 습관 하나가 결국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좋은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입대 전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눈치도 빠르고 일머리도 꽤 있었던 편인 것 같았다. 사령부 한 부처에 소속된 운전병이었던 나는 종종 행정병들을 도와주는 것도 즐기곤 했다. 사실 어려운 업무도 아니었고, 운행 대기 때는 시간도 많았기 때문이다. 보통 대기시간은 운전병 휴게실에서 TV를 보거나 휴식을 취했다.
그런 모습을 눈여겨 본 장교분이 독립 여단장 운전병을 뽑을 때 나를 추천했고, 참모장님(여단장님 바로 밑, 여단 서열 2위)께서 승인하셔서 전역 6개월 전 1호공관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알고 보니 참모장님이 사령부 간부들에게 괜찮은 운전병이 있으면 추천제로 여단장님 운전병을 선발한다고 하셨던 것이었다. 정작 나는 일명 ‘빽’으로 들어가는 자리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의 작은 배려를 좋게 본 간부와 여단장님 운전병 추천 제도로 선발하신 참모장님 덕분에, 두 가지 조건이 맞아 운 좋게 선발되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여단장님 부부가 나에게 보여준 배려는 상상을 초월했다. 동기는 “평생 나눠서 쓸 운을 군대에서 다 쓴 것 같다”고 말했다.
여단장님 부부는 성실한 크리스천이셨다. 새벽 기도 제목을 적어서 드리면 기도해 주셨고, 내 생일에는 여단장님 공관에 초대받아 내가 좋아하는 과메기, 미역국, 포도주까지 챙겨주셨다. 심지어 종종 음식도 해주시고 나눠주셨다. 여름에 사모님은 운동하시다가 올라오셔서 운전병인 나와 공관병에게 콩국수까지 직접 만들어서 내어주셨다.
사실 군 생활해 본 사람이라면 위 상황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알 것이다. 공관병이나 조리병이 음식을 만들어 여단장님 부부에게 드리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운전병’이라는 호칭 대신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셨다.
전역할 때는 장교 할 생각이 없냐고, 육군3사관학교로 입교하는 건 어떻겠냐는 말씀도 해주셨다.3사는 3학년으로 편입해 2년간 교육 후 소위로 임관한다. 여단장님은 “너도 좋은 차 타고 싶지 않아?”라고 물으셨고, 나는 “소박해도 좋으니 평범한 차에 사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돌아온 답변은 “나는 OO가 좋은 차 타고 다니고, 남들보다 잘 살면 좋겠다”라는 여운 남는 말씀을 하셨다. 나를 이쁘게 보셨던 여단장님께서는 사업가 친구분께 내 자랑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이 사실은 사모님께 전해 들었다. 친구분은 나를 한 번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사업을 하시는 여단장님 친구분을 말년휴가 첫날 만나 뵙고, 사업장 구경도 하며 면접을 봤다. 내 미래까지 친자식처럼 고민해 주시고, 잘되길 바라시는 그 마음이 아직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기분 좋은 여운을 안고 온다. 물론 나는 여단장님 친구분께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정중하게 거절하고 인사드렸다. 당시 나는 인복이라는 축복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전역 직전 사모님은 말씀해 주셨다.
• 나에게 ‘운전병’ 대신에 이름을 부르셨던 것에는 이유가 있으셨다. 가정에서 존중과 사랑받은 자녀는 밖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하셨다. 실제로 여단장님 이하 그 어떤 간부도 다른 운전병에게는 ‘운전병’이라고 부르지만, 나한테는 이름을 불러주시고 너무 잘해주셨다.
• 여러 가지를 챙겨주신 것은, 부모님께서 나라에 믿고 맡기셨기 때문이고, 또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시며 대해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다.함께한 시간은 6개월로 짧았지만(소속 중대 내무생활은 1년 6개월이었다), 인생에서 너무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면 사랑으로 가득 채운 병장 계급장과 그 사랑의 기억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이겨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세상에 정말 평생 쓸 운을 군대에서 다 쓴 거 아닌가 할 정도로 과분했다. 말씀대로 지금도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따뜻했던 기억을 에너지원으로 다시 힘을 낸다. 내가 시행착오도 많고 많이 돌아온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나 보다. 비유하자면, 트레일 러닝 코스에서 이탈이 아닌가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그게 맞는 코스인 느낌이다.
지금도 꾸준히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습관’을 중요시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