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더 소중할까?

용기, 사랑할수록...

by 물 긷는 자 연지신
토요일 2시에 면접 보러 오세요.

L광고회사 크리스틴 사장으로부터 면접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LA 광고계에서 ‘일 잘한다’는 평이 자자했다. 고등학교 때 이민 와서 영어가 유창했다. 명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 후 줄곧 광고계에서 일한 베테랑이었다. 거칠기로 소문난 이 업계에서, 거의 유일한 여 사장이었다.

그 회사 광고에는 미국적인 느낌이 강했다. 한국 출신 디자이너들이 대부분인 다른 회사와 비교하면,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사장이 실력 있으니, 회사도 탄탄했다. 보통, 여자들이 남자보다 회사를 더 건실하게 운영했다.

‘꼭 붙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면접이 토요일 오후라,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한인타운에 나왔다. 이제 통장 잔고도 거의 바닥이 드러나 아내와 나 모두 간절했다. 아내는 차 타고 오는 내내 두 손을 꼭 모으고, 말이 없다. 기도하는 모양이다.

애들은 뒷자리에서 웃고 떠들며 잘 놀고 있다. 무심코 아내에게,

“면접 끝나고 집에 갈 때, 우리도 저렇게 웃을 수 있으면 참 좋겠네.”

아내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긴장된 모습이었다.


회사는 윌셔와 버몬트 근처, 한인타운 중심부에 있었다. 면접 보러 차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내가 “잘 될 거예요. 혹시 안 도 실망하지 말아요.”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을 선택하는 쪽은 신중하고, 회사를 선택을 하는 쪽은 간절하다. 서로 기대하지만, 어긋날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둘러 인연이라 말한다.

인연이 이어지고, 깊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6층 입구에 세련된 회사 로고가 붙어 있었다.

“똑똑”

“네” 하는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가볍게 목례하며 "면접 왔습니다." 말하자,

사장은 “이리 오세요” 하며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잘 정돈돼 있었다. 한쪽은 통유리로 돼있어 그리피스 천문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다른 두 벽면에는 큰 책장에 두꺼운 디자인 관련 서적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넓은 책상 위에는 대형 매킨토시 모니터 두 대, 광고주 관련 서류, 인보이스, 회계 문서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제가 토요일엔 밀린 일을 몰아서 해요. 좀 어수선하죠?” 사장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얇은 안경을 썼다. 마른 체형으로 키가 168쯤 되는 도시 미인이었다.


미국엔 언제 왔냐, 한국에서 어떤 광고주를 맡아서 했냐, i 광고회사는 왜 그만하게 되었냐 등등 이것저것 기본적인 질문을 했다.

나는 꾸밈없이 대답했다. 꾸미면 집착하게 되고 결과도 좋지 않았다. 미묘하게 상대도 눈치챈다. 언제나 정직이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면접 분위기는 좋았다.


끝날 무렵에 “얼마 정도 받으면 좋겠어요?” 물었다.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면접에 보기 전, 아내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사장이, 월급에 대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아내가, “당신이 한 달에 2,500불 벌고, 내가 500불 벌면, 겨우 생활은 돼요.”


‘2,500 정도 받으면 좋겠다고 하면, 반응이 어떨는지…’ 생각이 복잡했지만, 더 머뭇거릴 수도 없었다.

“2,500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은 내려가지 말자. 만약 여기서 깎으려 하면, 서로 인연이 아니구나... 편히 생각하자.’


사장은, “3,000불 드릴게요. 월요일부터 출근할 수 있어요?”


월급 500불 더 받는 것보다,

취직했다는 것보다,

사장을 믿을 수 있어서

더 기쁘고 마음 놓였다.


‘네. 월요일부터 출근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는 뒤에 앉은 아이들을 돌아보며 내내 웃고 떠들었다.

나도 가끔 끼어들었다.


아내가 물었다.

"내일 오 사모님 댁 초대해서 축하 파티 열까요?"

“그거 좋겠네” 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세상이 좋아 보였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당연하지 않다.

어떤 이에겐 목숨 건 용기,

벼랑 끝에 서면 보인다.

삶의 거룩함과 엄숙함 -


그제서 세상을 바로 본다.



출근할 때 입을 옷 좀 보러 가요.

남편이 당장 월요일부터 출근한다는 말을 듣자, 가장 먼저 셔츠와 넥타이가 떠올랐다. 지금 있는 셔츠는 카라도 구식이고, 넥타이는 유행이 한참 지나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초라해지는 게 나았다.


아직 괜찮다는 남편을 데리고 마샬에 왔다. 여긴 잘만 고르면 쓸 만한 물건을 건질 수 있다. 이것저것 보다 맘에 드는 셔츠 두어 벌과 넥타이 몇 개를 골라 남편에게 입어 보라고 했다. 파란색과 분홍색 슬림핏 셔츠와, 폭이 좁은 요새 유행하는 스타일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입고 나오니,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뿌듯했다.

“내 남편 새 신랑 됐네.”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엄숙해 보였다.


사모님, 남편 취직했어요.
내일 저녁에 축하파티 해요.

집안 여기저기 다니며 청소하는데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미국 와서 처음 같다. 내일 저녁 준비로 벌써 들뜬다. 가까운 마트에 들러, 내일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물건을 고르며, 어릴 때 명절 기분이 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 큰맘 먹고 LA 갈비도 골랐다. 마음이 벌써 내일 저녁에 가있다.


사모님을 처음 본 건 작년 10월, 동네 도서관에서 열린 ‘마미 앤 미’ 유아 클래스였다. 참석한 엄마 대부분이 미국인이었는데, 거기서 같은 한국 엄마를 보니 반가웠다. 더구나 같은 충청도 출신이라 처음 봤지만 오랜 이웃 같았다.


사모님 댁은 유학 온 목사님 가정이었다. 아이가 넷, 그중 셋은 아들이고, 셋째가 딸이었는데, 우리 큰 애와 같은 학교 친구였고, 그 댁 막내는 우리 둘째와 같은 또래여서 이것저것 통하는 것도 많았다.


사모님은 남편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내가 시골에서 힘들게 살다가, 대기업 다닌다고 해서 결혼했지, 누가 이럴 줄 알았겠어.

과장으로 잘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신학 공부하겠다며, 휙 사표를 던졌지 뭐여. 대학원 3년 내내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래 거까진 좋다 그려. 아, 어렵게 신학교 졸업해서, 큰 교회서 사역 잘하다 좀 안정되는가 싶더니, 이번엔 유학 간다고 또 그만둔다는데... 내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께.”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애나 적어? 넷씩이나 되는데 어떡할라고 그러는지… 대사관에서 인터뷰하라고 연락 왔는데 이건 백 퍼센트, 비자 거절될 줄 알았어… 아니 그런데 영사가 그 자리에서 오케이를 한 거야. 참 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더라니께…”


나도 모르게 “휴~” 하며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저 댁보다는 우리가 낫네…’ 유학생 신분으로, 애가 넷인데 어떻게 버티는지, 내 상식으론 도저히 계산이 안됐다.

사모님은 말은 못마땅해했지만, 남편에 대한 신뢰는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이것은 그녀가 경험한 기적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한 채, 멀찍이 보기만 했던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 서로 험담을 하는 과정에서, 말이 보태져 과장되기 일쑤였다. 내용은 거의 비슷했고, 항상 따라다니는 단서가 있었다.

“목사 사모가…”


그들은 마치 목사 사모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 것 같았다. 엄마이기를 포기하거나,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초월한 완벽한 인격자를 기대하는 듯했다.

‘그녀라고 어찌 주저함과 창피함이 없었을까! 나 같으면, 죽었다 깨도 못할 일을 그녀는 해내고야 말았다. 그것도 매번…’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며, 나도 엄마지만 그 사랑과 용기의 집요함에 머리가 숙여졌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를 지속시킨 근원적 본능일까?'


어느 날 사모님이 내게 “자기야, 콜번 스쿨에 대해 좀 알아?”

“다운타운에 있는 음악 학교 아니에요? 유명한 곳인데, 왜요?”

“우리 막내, 거기서 첼로 개인 레슨 좀 시키려고”

“네에?...” 콜번에서 개인레슨 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 상식과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거기 대학교수님이 아주 잘 가르친디야. 우리 막내가 그동안 잘못 배운 거 같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이번엔 절대 안 될걸요…’ 속으로 장담했다.


사모님은 뭔가에 꽂히면, 그것만 생각한다. 무작정 애 데리고 교수를 찾아가겠다고 한다. 영어도 안 되면서… 게다가 막내는 음악 천재하고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결국 사모님은 애를 데리고 교수를 직접 찾아갔다.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며칠 뒤, 사모님이 내게 전화했다.

“방금, 콜번에서 레슨 해주겠다고 연락 왔어. 전액 장학금도 준디야.

애 데리고 가서 막 졸랐지. 영어가 안되니까, 봐준 것 같이야. 암만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께 포기하고 받아줬나벼

그녀는 웃으며 신나 하며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다는 투였다.

내 생각에 갇히면, 가능성도 가둔다. 그래서 수많은 가능성이 파묻히는 걸까?


나중에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여자 정주영’이라 불렀다. 그로부터 15년 뒤, 목사님은 책을 10권이나 펴냈고, 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큰애는 시카고에서 의료 업종에 종사하고, 둘째는 하버드 의대 다음으로 명성이 높은 UC 샌프란시스코 의대에 진학했고, 의사가 됐다. 셋째와 넷째는 실리콘밸리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정주영 씨 보다 더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요즘엔 골프에 푹 빠져 지낸다며, 주위에서 수군거린다. 어느새 싱글 골퍼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 반응도 질투 반, 부러움 반이다.

나도 가끔 그녀를 떠올리면, 무심코 이런 말이 나온다.

“목사 사모가…”

이러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오후 다섯 시, 사모님이 아이들과 도착했다. 목사님이 보이지 않았다.

“목사님은요?”

“오기 전에 대판 싸웠슈. 기분 상해서 같이 못 있겠다고 안 왔어.

목사라는 사람이…

사모님도 말끝마다 이렇게 말한다.

“목사라는 사람이…”


그녀는 모든 선입견에 흔들리지 않았기에, 끝내 해냈다. 그것은 사랑이고, 용기였다.

지금 사 남매는 매번 “엄마 덕분에…”라고 말하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지낸다.


“목사 사모가…”를 무릅쓴 사랑과 용기로

“엄마 덕분에… “로 바뀌었다.

무엇이 더 소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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