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우연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오늘 변호사한테 간 일 어떻게 됐어요?
수화기 밖에서 애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위에 두 언니가 이제 막 돌 지난 막내를 잘 데리고 논다. 여자 애들이라 사내아이와 달리 훨씬 손이 덜 가서 다행이다.
“으응… 잘 안 됐어. 이민국에서 서류를 못 받았대.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 너무 염려하지 마.”
집으로 가는 길이 꽉 막혔다. 내 마음도 도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 10월 LA 밤공기는 참 시원했다. 마음을 뚫어주지는 못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하나?
당장 어디 가있지?
이제 뭘 해야지?
전화를 끊고 생각이 복잡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남편 사업도 지지부진하고, 별 소망도 안 보여 하루하루 살 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평생 이렇게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하나?'
마음은 점점 돌아가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막상, 이렇게 결정하니 스스로 너무 초라해 보였다. ‘한국에선 미국 간다고, 다들 꽤 부러워했는데…’
아무 하고라도 말하고 싶었다. 목사님 생각이 나서, 바로 전화했다. 목사님은 나를 딸처럼 예뻐하셨다. 큰 딸이 나보다 한 살 어렸다.
“목사님, 저 수연이요.”
“어? 그래.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요?”
“우리 취업비자가 안 됐대요. 어쩌면 좋지요?” 목사님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잘 아는 친구가 있는데, 군대 동기야. 내일 만나서 얘기 좀 해볼 테니…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연락 주세요.”
전화로라도 마음을 털어놓으니, 한결 편안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들어왔다. 온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을 텐데, 집에 들어올 때 표정은 언제나 별 힘든 내색을 않는다. 남편이 힘들어하면, 진짜 견디기 힘든 거였다.
“피곤하지요? 식사하세요.” 남편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따뜻하게 덥혀서 갖다주었다.
“방금 목사님 하고 통화했어요. 잘 아는 분이 있는데, 알아봐 준대요.
잘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전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온다. 남편에 대한 배려였다.
미국에 온 지 거의 반년이 지나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길 이름도, 거의 매일 집으로 날아오는 세일 쿠폰도 정성껏 모으고 있다. 아이들 친구 엄마도 여럿 알고 지낸다. 예정에 없던 식사 자리가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차린 것 없지만 많이 드세요” 이 말이 딱 맞았다. 서로 이해하고 민망해하지도 않는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더 공감할 수 있었다.
뒤에 애들을 태우고 여기저기 일 보러 다닌다. 애들도 이젠 당연한 줄 알고 보채지 않는다. 저들끼리 영어로 대화한다. 반년 만에 참 많이 바뀌었다.
아직 남편 수입이 일정치 않기 때문에, 일이 들어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최근, 다운타운 옷 공장 하청 일을 시작했다. 옷에 들어가는 반짝이를 붙이는 일인데, TV 드라마에서 본 인형 눈 붙이는 일과 비슷하다. 시간당 4달러가 채 안 되는 열악한 일이었지만, 집에서 애들을 돌보며 할 수 있으니 감사했다. 일감을 주는 아줌마는 남편과 옷 공장 한쪽 구석에서 작은 기계를 놓고 일하는데, 규모에 비해 수입은 꽤 짭짤한 것 같았다. 기회가 되면, 하나 차리고 싶었다.
‘내가 하면 훨씬 잘할 텐데…’
일감을 납품받는 원청 공장에서 내가 한 일을 보고 “이거 누가 한 거예요. 이 사람 한 거는 손 볼 게 없어요. 참 잘해요.” 이런 칭찬을 자주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일을 잘하니까 계속 어려운 일만 맡겼다. 익숙해질 만하면 까다로운 일을 주고 쉬운 일은 자기가 하거나, 솜씨가 서투른 사람에게 주었다.
처음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일 잘하는 사람한테 더 잘해줘야 하는 것 아니야?’ 불만이 컸다. 찬찬히 세상을 바라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온통 불공평했다. 돈 때문이었다.
원래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 것이 중요했다. 따지고 불만을 말해봐야 나만 손해였다.
내 형편을 알고, 적응하는 것이 생존의 기술이 됐다. 과학 시간에 배운 적자생존의 법칙이 여기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공정함과 정의는 나 같은 약자에겐 아득한 남 이야기였다.
남편 친구 혁수 씨가 미국에 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와는 참 특별한 인연이었다. 남편은 그와 종로에서 우연히 선배를 만나 광고 회사로 이직했다. 원래 미국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또 그의 적극적인 권유로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창업을 염두에 두고, 미국 현지 유명 샌드위치 매장을 둘러보며 시장 조사를 하러 왔다. 남편이 넌지시 묻는다. “내일 저녁, 집에 초대하면 어떨까?” 당시, 남편은 매일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집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코인 빨래방 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좋은데, 밤 청소는 어떡하죠?”
남편은 잠자코 말이 없다.
“내가 가도 되는데, 애들 때문에…”
“애들은 내가 볼게. 당신은 저녁 준비 마치고, 급한 볼 일이 있다고 나가면 되지. 일 끝나고 돌아오면, 내가 혁수를 호텔로 데려다줄게. 괜찮겠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편과 그는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 할 사이였다.
다음 날, 오후 5시쯤 남편과 혁수 씨가 집에 도착했다. 그는 면세점에서 샀다며 칠레산 와인을 건넸다. 병만 봐도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는 인천과 가까운 부평에 살고 있어서, 가끔 함께 어울렸다. 미국 오기 직전, 부부가 함께 식사한 이후 처음이었다.
“제수씨, 오랜만입니다. 고생 많으셨지요?”
“재미있어요. 남편이 너무 일찍 들어오는 것만 빼고는요.” 모두 웃었다.
한국에 있을 땐 남편이 자정 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다. 여기선 저녁 약속이 1년에 두세 번 있을까 말까였다. 솔직히, 외식할 형편도 안 됐다.
그는 한국의 직장 생활에 많이 지쳐있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조그만 구멍가게 라도 해야겠어. 야, 네가 부럽다.”
나와 남편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부러운데, 그는 우리가 부럽다고 한다. 항상 남의 떡이 커 보인다.
이른 저녁을 차려주고 나서,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쩌지요. 제가 선약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하는데… 두 분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그는 남편에게 이미 들은 듯했다.
“아,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남편도 짧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조심하고.”
집을 나와 코인 빨래방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동네가 험해 혼자 가기엔 망설여져, 큰애와 함께 갔다.
주인은 CPA인데 부업으로 여기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 내게는 먼 이야기였다.
주인이 퇴근하며 가끔 들리기 때문에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세탁비누 넣는 곳, 건조기 내부에 먼지 거르는 곳, 세탁기와 건조기 외부, 바닥 청소, 고장 난 것은 주인한테 바로 알려야 한다. 크지 않은 가게지만 제대로 하려면 3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출발할 때, 비가 조금씩 떨어지더니 도착할 때쯤 꽤 많이 내린다. 마침, 노숙자들이 처마 밑으로 와서 비를 피한다. 이불을 깔고, 푹 뒤집어쓰고 아예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 저쪽 구석에는 어떤 젊은 여자 둘이 낯 뜨거운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다. 이곳은 여자 혼자 감당하기 힘든 곳이다.
어리지만, 큰애가 곁에 있어 든든했다. 청소를 마치니, 밤 10시. 다음날 6시에 문이 자동으로 열리도록 타이머를 맞춰놓고 집으로 향했다. 지금 출발하면, 30분 정도면 집에 도착한다.
빨리 가야 하는데, 빨리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오는 차 안에서 마음이 내내 편치 않았다.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불안한 마음이 엄습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이 찾아오면, 마음이 요동친다. 감사한 마음이 들다가, 현실을 보면 암담해진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우리가 별 걱정 없이 잘 사는 줄 안다. 그러니 속시원히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다.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서로 마음만 무거워져 도움이 안 된다.
책임은 무겁고, 현실은 밝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두 사람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간단히 마무리를 하고, 아이들 자는 것 돌아보고,
잠자는 남편을 깨워, 친구를 한인 타운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두 사람 다 차 안에서 내내 잠든 채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지났다. 옆자리에서 깊이 잠든 남편을 일으켜 집으로 들어가니, 세 아이는 이불을 걷어찬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내 수고로 남편도, 딸들도 잘 자고 있다.
가족을 돌아보니,
눈가는 촉촉하고,
입에는 웃음이 -
마음을 휘졌던
불안이 저만치 갔다.
평범한 일상이란
수많은 우연들이
한 치 오차 없이,
치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가능한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