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수 번외 편 : 내부회의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by 김땡땡

어느 날, 퇴사 이후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건 인간쓰레기가 아니다.
그건 상무도 아니고, 김 부장도 아니다.

그건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건 나를 먹지 않는다.
나를 조종한다.


회사에서 하던 내부회의가 아닌,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감정들의 내부회의가 격하게 이루어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행복이는, "즐겨~ 인생 한 번이야~, 어차피 실업급여 나오잖아. 인생 너무 편하다~"

반면 슬픔이는 "왜 이렇게 마땅한 취업 자리가 없지? 불황이라더니 이거 너무 심각한 거 아니야? 행복아 너의 뺨아리를 날려볼게. 정신 좀 차려"

물론 그 옆에 분노는 놀랍게도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이게 다 너의 선택으로 벌어진 지팔지꼰이다!!!!"


타이틀에 '기생수'라는 단어를 섞어서 구성한 이유는, 사실 요즘 넷플릭스에서 '기생수'라는 만화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화에서 보면 외계생물이 지구 인간의 몸에 기생하여 뇌를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인간은 기생생물에게 잡아 먹히게 된다. 반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물은 운이 좋게도, 오른손에 기생_생물이 자리를 자리를 잡고서 공존을 하게 된다.


나의 내부에는 수많은 감정_생물들이 공존을 택하고 있다. 가끔 반려 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기에, 감정_생물들과의 공존이 몹시 흡족스럽다. 밥을 주지 않아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감정들이라니, 이것을 반갑게 여겨야 할지, 혹은 감정들이 원하는 바를 경청해야 할지, 과연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 감정_생물들과 제대로 한 번 마주 앉아 보기로.

오늘부로 내부 긴급 임시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의장은 나다. 하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두려움에게 있다.

행복이는 회의 시작 3분 만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는다.

“어차피 실업급여 나오잖아. 인생 한 번이야. 지금 아니면 언제 쉬어?”

슬픔이는 두꺼운 채용공고 출력물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공고 수 줄어드는 거 안 보여? 경쟁률 봤어? 이거 생각보다 심각해.”

분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이게 다 네 선택이야. 누가 퇴사하랬어.”

그리고 가장 말수가 적은 존재.
두려움.

두려움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대신 아주 논리적인 얼굴로 말한다.

“굳이 지금 무리할 필요는 없지, 불황이잖아 조금만 더 상황을 보자.”

나는 그 순간 깨닫는다.

이 회의의 의장은 나지만, 의사결정권자는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용기 내어 선언하기로 했다.

“좋아. 그럼 계약서를 쓰자.”


[감정_생물 공존 계약서]

두려움은 지원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물리적으로 방해하지 않는다.

행복은 실업급여를 영구적 수입으로 오인하지 않는다.

슬픔은 자정 이후 미래 파산 시나리오를 상영하지 않는다.

분노는 ‘지팔지꼰’이라는 단어 사용을 월 3회로 제한한다.

모든 감정_생물은 숙주의 행동권을 존중한다.


단, 본 계약은 감정_생물의 상태에 따라 언제든지 무효가 될 수 있다.

나는 서명했다. 그 순간에는 분명히 서명했지만, 이 서명이 지워질지, 남아있을지는 나의 선택이다.
두려움은 미소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기생수는 숙주의 뇌를 차지한다. 그리고 인간을 먹는다.

하지만 나의 감정_생물들은 나를 먹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유지한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도록.


회사에서는 인간쓰레기들이 나를 잠식했다. 그곳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죽였다.

퇴사 후에는 감정들이 나를 잠식한다. 이번에는 살아남기 위해 행동을 멈춘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항상 무언가에 잠식된 채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회사, 타인, 평가, 두려움, 안정.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기생수라는 만화에서, 주인공은 기생생물과 공존을 택했다. 제거할 수 없으니 협력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두려움을 제거하지 않겠다. 대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무섭지. 그래도 지원은 할게.”

그 순간, 두려움은 잠시 조용해진다.

공존이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오늘도 내부회의는 열린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의장이다.

비록
완전한 지배자는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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