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대 기숙사 오픈 하우스와 아벡크 로드

K대학의 추억

by 맹부


집에서 독학재수를 고집하면서 제대로 된 재수생활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학력고사 성적은 당연히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동대구역에서 가까운 대구시 북구 산격동에 위치한 국립대학인 K대학에 진학했다.


그때 K대학으로 간 이유는 학력고사 점수를 맞춰서 지원한 것도 있지만, 고교 친구인 김모 군의 권유도 한몫했다. 86년 3월 개학 직전에 K대학내 기숙사로 짐을 옮겼다. 친구인 김모 군과 나는 기숙사 1층 같은 방은 아니지만 바로 옆방에 각각 배정되었다.


내 친구 김모 군은 첫주를 제외하고는 기숙사에서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그 친구의 여친 또한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캠퍼스에서 가끔 김모 군 커플과 자주 마주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김모 군은 자주 기숙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의 서운함이 없지 않았다. 서로 같은 대학 가자고 의기투합 했었는데 이렇게 나늘 외면하고 자기 혼자만 열심히 싸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 학교 생활에 적응해갔다.


5월이 되자 학교 축제기간이 시작되었다. 울산 시골에서 대구로 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까지 온 처지라 축제기간에도 고시공부를 위해 기숙사에서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날은 기숙사 오픈하우스 하는 날이기도 했다. 당시 K대학은 교내에 남학생 기숙사만 있었다. 그래서 매년 1회 축제기간중 하루만 여친 등 외부인 출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여친도 없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다고 생각해서 오픈하우스 행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점심을 먹을려면 기숙사 식당으로 가야 했다. 별 생각없이 기숙사 식당에서 외부인들과 식사하는 기숙사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부러운 마음도 생겨났다. 그래도 그럭저럭 꾸역꾸역 밥을 먹고 다시 중앙도서관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2층 구석자리로 가고 있는데, 저 멀리 창가 자리에 같은 과 여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괜한 마음에 다가가서 아는 체 했다. 그녀는 해맑은 미소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커피나 한잔 하자"고 했다.


그녀는 "좋아요"라고 하며 나늘 따라 나섰다. 뜻하지 않았는데 일이 너무 잘 풀려 나갔다. 내가 소위 "연애박사" 이런 것 하고는 거리가 먼 샌님 스타일인데 그날은 좀 이상했다.


100원 짜리 자판기 커피를 한잔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기숙사 오픈하우스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는 기숙사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나 기숙사 한번 가보고 싶어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기숙사 한번 가볼래" 했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부도 잘 안돼고, 기숙사 내부도 궁금하니까 같이 가자"고 했다. 엉겁결에 그녀와 나는 중앙도서관에서 다시 기숙사로 걸어갔다. 기숙사에 도착해서 독서실, 휴게실 등 부대시설을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내방을 보여 주었다.


2인 1실의 방은 목조 2층 침대와 책상 2개가 있었고, 창가쪽으로는 난방용 라디에이터가 전부였다. 그녀는 단촐한 내방을 보고 나서 책 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을 유심히 보았다.


고시과목 책들이 있는 것을 보고, "너 혹시 고시준비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왜 불어불문학과로 진학했는지? 왜 외무고시 공부를 하는지? 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꽤 관심있게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세련되지 못하고 거친 내 인생목표와 무대뽀 정신세계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듯 했다.


당시는 '사귀자' 뭐 이런 말을 서로 하지 않는 시대였다. '무언의 눈빛교환' 그것이 전부였다. 그날부터 우리 둘은 여친과 여사친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다 2학기가 시작되고 10월 어느 가을날, 그날도 나는 한치의 변함없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날씨는 찢어지게 좋아서 그런지, 그날은 도서관에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고, 나도 왠지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가방을 싸서 기숙사로 돌아갈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조용한 2층 도서관의 타일바닥을 또각 또각 하이힐 구두소리를 내며 누군가 도서관 구석자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개들어 보니 그녀였다.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했다. 평소와 다르게 한껏 멋을 부리고, 작정하고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공부하다 놀라서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았다. 주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일단 그녀를 데리고 도서관 로비로 급히 나왔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냥 배시시 웃으며 "별일은 없고, 그냥 날씨도 좋으니 저녁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 길로 학교 북문 근처 경양식 집으로 갔다. 돈까스 정식을 먹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무 생각없이 기숙사 오픈하우스에 그녀를 데리고 간 것 말고는 내가 한 일이 없는데, 일이 자꾸 커지고 있어 난감한데..."


물론 나는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어떤 남자가 자기 좋다고 찾아오는 여자를 싫어하겠는가?

나의 인생필름 2부에서 소개하겠지만, 나란 인간은 '군대 제대할 때 까지 여자를 잘 몰랐다. 아니, 여자들 하고 노는 것보다 남자들끼리 의리를 외치며 술마시고, 공차고, 운동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순수남이었다'


그런 나를 잘 모르고 그녀는 내게 호의를 보여왔던 것이다. 그날 저녁 경양식집에서 나와 캠퍼스로 들어설때는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10월의 가을 저녁은 제법 쌀쌀했다. 하얀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치마를 입은 그녀는 다소 추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점퍼를 어깨에 걸쳐 주었다. 사실 나도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살짝 한기가 느껴졌다.


소화도 시킬 겸 우리는 북문에서 외곽을 돌아 정문쪽으로 걸었다. 학교 정문에서 중앙도서관으로 가는 길에는 '아벡크 로드(Avec Road)'가 있었다. 아벡크 로드를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의 좁은 숲길이 있었다. 나도 그녀의 안내에 따라 어느덧 손을 잡고 아베크 로드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목석같은 나였지만, 난생 처음으로 여자의 손을 잡고 다소 은밀하고 어두운 숲길을 걷는 느낌은 색다르고 약간의 현기증도 났다. 손에 땀이 연신 나서 중간에 손을 풀었다 잡았다를 반복했다.


그 숲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그녀와 나는 몇번의 추가적인 만남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드라마틱한 진전은 없었다. 1986년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귀향했다. 그리고 나는 이듬해 2학년을 등록하지 않고 그해 9월말 카투사로 군입대를 했다.


그 이후 스토리는 언젠가 재개될 인생필름 2부에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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