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전해지는 온기
모두가 시작을 떠올리는 아침에 나는 마지막을 생각했다.
우리 신혼집은 15층 중에 5층이었다. 창문으로 햇살이 넉넉히 들고 트여 있어 눈만 들면 언제나 하늘을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이 집으로 이사 온 것도 하늘이 보이는 트인 전망과 저녁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그 풍경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 이후로 창밖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온도는 급격히 식었다. 이 집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가 사라진 후부터였다. 문득 궁금했다. 5층이라는 높이는 나의 비상한 계획을 완벽하게 도와줄 수 있을까?
“여기서 떨어지면 머리부터 닿을까? 심장부터 가라앉을까?”
마른 모래처럼 흘러내린 건조한 물음을 동생에게 던졌다. 돌아온 대답은 어쩐지 차갑고 단단한 삽자루 하나가 흙더미 정중앙에 꽂히는 듯 거침없이 날카로웠다.
“거기는 애매한 높이야! 거기선 죽지도 못해! 누굴 고생시키려고 그래?”
동생도 독한 말 끝에 더 독한 단어를 찾아내어야만 견뎌지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드문드문 그런 종류의 전화가 걸려오는 날에는 내 전화를 끊고 나서도 16개월짜리 조카의 이유식 준비가 여지없이 늦어지곤 했다. 그렇게 가족들은 저마다의 견디는 법을 찾아야만 살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말도 맞았다. 다만 혼자서 도저히 더 높은 층으로는 올라갈 자신이 없었으므로, 결국 그 비상한 계획은 실천으로까지 옮겨지지 못했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놓치지도, 그렇다고 힘껏 끌어안지도 못한 채 그 어정쩡한 높이와 거리는 한동안 나의 침묵을 견디게 만드는 애매한 이유가 되었다. 어느 날 긴 침묵을 통과한 남편이 말했다.
“여보 기분전환하러 갈까? 예쁘게 머리 하면 기분도 한결 좋아질 거야.”
남편은 내 기분이 더 나아지는 방법을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렇게나 방치해 둔 내 마음처럼 머리카락 길이도 제멋대로 길어나고 어수선해 있었다. 사실 이 집에서 어수선하지 않은 것을 찾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익숙했던 일상의 풍경들은 마치 제각각으로 놓인 도자기들 사이, 작은 틈새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취급주의’ 빨간딱지가 모든 나날에 붙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넘어가던 일상은 용기와 결단이라는 첨가물을 반드시 복용해야만 무사히 소화해 낼 수 있었다.
나는 남편 손에 이끌려 동네 상가에 있는 미용실로 향했다. 남편은 익숙하게 상가 5층을 눌렀다. 처음 가보는 곳이 아니지만 그날의 공기는 처음 가보는 곳의 냄새가 났다. 가장 먼저 반긴 미용실 파마약 냄새가 이토록 진했는지 그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았다. 그 앞에 내가 앉았지만 나는 없었다.
“오랜만에 오시네요?!”
모든 것이 낯선 공간 속에서 익숙한 공기가 공중에서 퍼졌다. 친숙한 것은 딱 그것 한 가지였다. 다정하게 안부를 물어오는 헤어 디자이너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를 안심시켰다.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잘라주는 그분의 손놀림이 유난히 신중했다.
서걱거리며 차분하게 지나가는 가위질을 따라 무거웠던 머리카락이 땅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나도 모르게 제법 자라난 불안과 걱정이 함께 잘려 땅으로 툭 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평소보다 우리는 말을 아꼈다. 앞을 가로막은 거울은 그 어떤 의문도 튀어 오르지 못하게 누르고 침묵을 선택한 두 사람의 무표정한 얼굴만을 비추고 있었다. 서걱거리는 가위질 소리만 우리의 어색한 침묵을 메웠다. 마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예쁘게 손질된 머리를 해내고 싶은 듯 남다른 열심을 보였다.
“다 됐어요. 한번 만져 보시겠어요?.”
그녀는 머리카락이 떨어진 어깨를 다정하게 털어주며 말했다. 내가 ‘눈’보다 ‘손’으로 확인하는 사람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린 듯했다. 손끝에 닿는 머리 길이가 낯설면서도 가지런했다. 참 오랜만에 만져진 완벽함이었다.
디자이너 선생님은 내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말했다. 손에 닿는 생각지 못한 온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사실 선생님이 제 마지막 손님이셨어요.”
말보다 손의 온기가 먼저 닿아 있었다. 30년 넘게 머리만 만져온 그녀는 건강이 더는 버티지 못해 오늘로 일을 내려놓는다고 했다. 딸과 사위에게 자리를 완전히 넘기는 날이라고 말을 이었다. 생의 마지막을 생각한 내 앞에 생업의 마지막을 통보하는 사람이 서 있었다.
“손님에게 이번만큼은 돈을 받고 싶지 않아요. 제 작은 마음입니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했다. 결코 애매할 수 없는 다정함이었다. 아쉬울 것도 미련도 없이 모든 걸 다 쏟아내고 완주한 주자의 목소리에는 후련함과 기품이 있었다.
꼭 그렇게 해 달라는 말은 꼭 그렇게 살아 달라는 말로 들렸다. 그 생각 끝에 이런 마음이 찾아왔다.
'나는 아직 내 몫의 삶을 완주해 보지 않았다.'
그 마음 하나가 내 안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내가 끝까지 감내해야 할 생의 몫이라는 게 있다면 정말 이분처럼 미련도 없이 끝까지 가 보아야 하는 건 아닌가?
불현듯 다가온 우연한 주자의 환대는 하루를 시작하는 창 앞에서 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던 내 어깨 끝을 두드렸다. 나는 창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다음 주자인 내게 전달된 손길은 보이지 않는 묵직한 책임감 같기도 했고, 반드시 이어 나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은 급기야 다시 교단 앞에선 내 모습을 상상하게도 만들었다.
다정한 마지막 인사 앞에 뜨거운 작별을 남기고 문 밖을 나섰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느렸지만 조금은 더 여물어진 걸음으로 단단한 땅을 밟았다. 나는 분명 어제와는 다른 안전한 대지 위에 서 있었다.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었다. 여름이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떠난 자리 위에 또 다른 계절은 새로운 푸름을 포개어 올려두는 듯했다. 나는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내 손을 감싸던 그녀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날은 삶의 끝만 바라보던 내가 다시 시작하는 입구를 마주하게 되는 날이었다. 이처럼 다정한 마지막은 누군가의 새로운 계절을 여는 첫 문장이 되기도 한다. 오후의 볕처럼 따뜻한 그녀와의 안녕은 한때 나를 붙잡았던 어둠의 경계에 미세한 틈을 냈다. 애매한 높이에서 흔들리던 내 마음은 그 온기 한 줌에도 조용히 중심을 찾기에 결코 애매하지 않았다.
쾌청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나는 손끝으로 머리카락 끝을 연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어쩐지 그날만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우리 집이 있는 5층까지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그날의 공기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나는 토라져있던 생에게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