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민트-당신의 사랑은 어떤 색감인가요?

다시 달리는 자전거

by 유니크한J

마음에도 색이 있다면, 사랑이 더 단단해져 가는 순간은 어떤 색으로 물들까?


이른 공기에 갓 지은 밥 냄새가 묻어 있었다. 소풍에 빠지면 아쉬운 건 도시락이라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가지런히 담은 유부초밥에서 고소한 향이 났다. 창문을 열자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 바람은 아직 눅눅했지만 그 속엔 가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시절의 사랑도 그런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짙지도 그렇다고 옅지도 않은 한번 스며드면 오래 기억되는 향기. 우리 두 사람에게 꼭 그런 향이 났다.


사 귄 지 일 년이 조금 넘었던 시절, 장거리 연애 중이었던 우리는 주말이 오면 서로를 위한 시간을 가졌다. 그 당시 나의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매주 내가 있는 지역으로 내려왔다. 그날 우리는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큰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적당한 바람이 부는 오전, 태양볕도 바람도 모든 것이 완벽한 주말이었다. 아이들과 부모들, 연인과 노부부가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우리도 제법 완벽한 한 컷의 배경을 차지하고 있었다.


미리 말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그는 하늘색 반팔 카라티를, 나는 연분홍을 입고 나타났다. 누가 봐도 우리는 제법 잘 어울리는 연인이었다. 햇살과 바람의 결이 옷깃에 닿을 때마다 민트향 같은 청량한 향기가 우리의 마음도 두드리고 갔다.


그가 말했다.


“우리 자전거 탈까?”


앙증맞은 바구니를 매달고 흰색 매끈한 몸체를 자랑하는 2인용 자전거가 우리 앞에 섰다. 자전거까지 등장하니 그날의 공기는 청량하기가 포카리스웨트 광고의 한 장면처럼 투명하고 산뜻했다.


도시락을 흰색 바구니에 담고 우리는 넓은 공원을 그렇게 한 몸처럼 달렸다. 오르막을 만나는 순간은 두 다리에 동시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박자가 어긋나면 필시 더 힘들어지는 구간이라 자칫 한쪽이 늦으면 어김없이 균형이 깨졌다.


“하나, 둘, 하나, 둘.”


시키지도 않은 그의 구령에 맞춰 우리는 동시에 팽팽해진 페달을 눌러 밟았다. 그렇게 함께 무게를 밟고 견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솔직히 이럴 거면 차라리 내려서 끌고 가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리듬이 되어 내 몸을 이끌었다.


깔딱 고개를 지나면 반드시 내리막 길도 있었다. 언제 오르막이 있었는지 잊힐 만큼 시원한 순간이 펼쳐졌다. 지칠 때까지 달려볼 기세로 바람을 가르며 전진했다. 급기야 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두 팔을 쭉 펴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 보기도 했다. 그와 함께라면 이 세상 끝까지라도 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찾아와 안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짙은 초록이 재빠르게 모두 가을빛으로 갈아입던 어느 날, 우리는 몇 년 만에 그 자전거를 타 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럴 요량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가을바람은 적당했고, 집에서 무료한 주말을 보내며 시간이 빨리 지나가 주기만을 바라던 우리 둘 모두에게 일단은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찾아온 거다. 계절이 우리의 등을 떠민 셈이었다.


연애시절 자주 찾던 그 공원은 여전히 그 느낌 그대로였다. 우리가 일전에 대여했던 자전거도 그대로 있었다. 다만 흐르는 시간 속에 조금 닳아진 것 빼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낡아진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바뀐 계절에 맞지 않게 여전히 반팔 차림인 우리만 어쩐지 완벽한 풍경 속에 이방인 같았다.


“자전거를 다시 탈 수 있을까?”


문득 겁이 덜컥 났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후 내 앞의 세상은 낯설게 느껴졌다. 작은 돌멩이, 아니 작은 턱 하나도 내겐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으므로 멈칫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이 쫄보~.”


남편은 웃으며 능숙하게 내 오른손을 자전거 안장 위에 올려주었다. 시각장애인에게 물건을 설명하거나 자리를 안내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상대의 손을 등받이를 만질 수 있게 해 주거나 의자의 앉는 부분에 올려주면 방향과 높낮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배려의 방식이다. 그야말로 손이 눈이 되는 삶이었다.


안장의 높이와 방향을 확인한 나는 크게 숨을 고르고 마른침을 삼켰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자전거 따위를 타는 일에 큰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현실이 살짝 씁쓸했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여전히 내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듬직했고, 그 가을 공기는 지독하게도 청명했으며, 꼭 용기를 내어야 한다면 이날만큼 적당한 날도 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자전거 안장 위에 안착했다.


“여보도 앉았어? 이제 출발해?”


자전거는 두어 번 휘청거렸다. 무게 중심이 흔들려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더 불안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기우뚱거리고 휘청이는 순간, 그때야말로 힘껏 첫 페달을 밟아 전진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왼발부터 힘이 들어갔다. 기우뚱거리던 자전거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우리가 함께 박차고 일어난 그 방향대로 달려 나갔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계절은 기어이 우리를 일으켰다. 같은 방향을 향해 달리게 만들었다. 페달을 밟는 발에 연신 힘이 들어갔다.


피부에 닿는 바람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우리의 웃음도 공기 속으로 함께 퍼졌다. 그렇게 무거운 일상을 뚫고 우리는 한동안 앞을 향해 달렸다. 우리를 가두던 투명한 벽에서 출구를 찾아 내딛는 페달은 꽤 용맹스럽기까지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앞을 못 보는 사람도, 도움이 필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내가 감당할 몫의 힘을 써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어김없이 자전거는 그만큼 앞을 향해 달려 주었다. 내가 힘껏 꺼낸 용기만큼 과거의 시간과는 점점 멀어져 갔다.


삶을 살아내는 방식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끈적이던 침묵을 박차고 일어난 우리에게 그날 공원에는 민트색 바람이 불었다.


희미하게 바래진 색도, 그렇다고 탁해진 것도 아닌 짙은 초록에서 한층 유연하고 넓은 품을 가진 색감이 우리를 포근히 감쌌다. 그 자유로운 바람을 가르며 달릴 때 긴장감을 품고 빠르게 울리던 일상의 박자가 서서히 느려짐을 느꼈다. 이제는 좀 느슨해져도 되지 않겠냐는 무언의 허락 같기도 했다.


변형된 것도, 변색된 것도 아닌 색.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깊어가는 그 계절에는 세상이 민트빛으로 물들었다. 상황은 예상 밖으로 변할 수 있고, 변변찮은 용기로 이 삶을 살아내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서 페달을 힘껏 밟아 나아갈 수 있겠냐고 삶은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 준 그와 다시 달릴 수 있었던 내 마음이 함께 물들던 그날, 나는 이 남자와 함께라면 이 지구상 그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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