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의밤
나의 슬픔의 모양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상처의 쓸모와 용도를 찾아내려 안간힘을 쏟았다. 괜찮은 의미와 그럴듯한 이유를 덕지덕지 붙여야만 나의 내일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 그게 내가 숨을 고를 수 있는 안전한 선택이라 여겼다.
상처에서마저 그 쓸모를 찾고 있는 나란 사람은… 어쩐지 커다란 쓰레기 하치장 위에서 정신없이 쓰레기 더미를 파헤치는 넋 놓은 사람 같기도 했다.
풀벌레도 잠든 깊은 밤, 별빛보다 어둠이 더 짙게 내려앉은 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벗들과 줌에서 만났다.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는 지나온 시간들을 펼쳐 놓고 있었다. 상처에 쓸모를 찾는 중이라는 내 넋두리에 삐딱함을 담당하기로 한 벗이 툭 말을 건넸다.
"상처의 쓸모? 그거 생각 안 하면 안 돼요?"
"꼭 상처에 쓸모를 찾아야 하나요?"
"상처는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존재할 자격이 있어요."
더 이상 상처에 난 딱지를 뜯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조용한 당부처럼 들렸다. 그런 의미 따위 없어도 그저 그 모습 그대로도 괜찮다는 말로 닿았다. 그 시간을 기어이 통과해 여기까지 담담하게 걸어와 준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로 남았다.
그때, 마음의 벗이 이 밤에 어울린다며 시 한 편을 선물처럼 읽어 주었다.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정호승 '슬픔으로 가는 길' 중에서-
생각해 보면 슬픔의 눈물로 엮어진 그 길 위에 역시나 혼자라고 생각될 그 시간에는 늘 내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
시절마다, 구간마다 만났던 아름다운 사람들은 내게 왜 그런 상처가 새겨져 있는지, 어떤 의미를 얻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곁에 있어 함께 걸었다.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추고, 기분 좋은 날은 콧노래도 부르며 함께 그 길 위에 있었다.
세상에는 그저 거기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절이 있다. 마치 초록이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을 때 그 존재의 쓸모와 용도를 굳이 계산하지 않듯이.
따뜻한 구들장 아랫목에 두런두런 둘러앉아 우리는 서로의 소리에 마음을 기울였다. 지나온 모든 시간들을 안아 주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저마다의 깊은 울림으로 엮어온 날들을 품에 안았다가 놓아주는 일.
그 밤, 우리는
저마다의 계절을
송연(松煙)하고 있었다.
마치 서서히 타올라 사라지되 향은 오래 남는 시간처럼. 그 시간의 주인공이 우리라는 걸 새롭게 각인하고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도 충분하다는 말을 건넬 때, 존재에 태그를 달지 않고 원물 그대로 바라볼 때 비로소 모든 애씀과 증명하려고 하는 의지는 눈 녹듯 녹는다.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길로 접어들던 시절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우리의 송년의 시간은 서로를 토닥이는 온기와, 넘치는 공감으로 찰랑이며 흘렀다. 그렇게 우리는 은하수 빛 밝은 밤 아래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깊은 밤을 이불 삼아 덮어 보았다.
언젠가, 아주 멀지 않은 어느 날에는
나의 깊은 밤도 송연(送宴)할 날이 오리라는 마음이 다가와
조심스러운 기척을 남기고 갔다.
바깥은 차가운 겨울인데
내 마음에는
여름날의 푸름이
잠시 머물다 갔다.
상처에 난 딱지를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상처는 스스로 빛을 낸다는 말이 찾아와 밴드처럼 붙었다. 어쩐지 이제 더 이상 쓰레기 하치장 위에서 넋을 놓는 일도, 상처에 난 딱지를 뜯는 일과도 거리를 둘 수 있겠다는 마음이 찾아와 고개를 들었다.
그날 밤, 부지런한 밤공기에 말갛게 씻긴 달빛은 그렇게도 밝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