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목소리로 읽어 주시길!
연령대와 무관하게 글을 의미 단위로 끊어 읽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의 낭독 방식을 문자화하자면 대략 이런 식이다.
(잘못 읽거나 빠뜨린 글자가 없다고 전제할 때)
“언제부턴가내손에는더이상둥글고향긋한탱자열매가들어있지않게되었다. 그손에는무거운책가방과영어단어장이,그다음에는누군가를향해던지는돌멩이가,때로는술잔이들려있곤했다.”
- 출처 : 나희덕,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
글을 이렇게 낭독(혹은 묵독)한 사람에게 ‘손에 더 이상 향긋한 탱자 열매가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는다면 99%, 바로 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문학적 표현에 약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팃포탯은처음에무조건협력합니다. 만약상대가똑같이협력하면,둘다좋은점수를얻습니다. 하지만상대가팃포탯을배반하면상대는높은점수를얻지만팃포탯은한점도얻지못합니다. 이런상황에서팃포탯이상대에게아무리배반당해도계속협력한다면,팃포탯은모두에게이용당하게됩니다.”
- 출처 : 수유너머N, 『진화와 협력』, 너머학교, 2016
우회적 표현이 전혀 없는 비문학이다.
어려운 단어가 포함되어 있거나 복잡한 원리를 해설하는 글도 아니다.
하지만 글을 이렇게 낭독(혹은 묵독)한 이에게 ‘팃포탯에게 왜, 어떤 문제가 발생하냐’고 물으면, 역시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왜, 이미 읽은 글을 다시 읽어야 답할 수 있을까?
문장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지 않은 채 글자의 소리만 발음했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면서 글의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문제에 대한 답만 찾는 방식의 읽기’가 깊이 뿌리내린 사람이라면, 다시 읽고도 ‘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기 십상이다.
글을 읽을 때 의미 덩어리로 끊어 읽지 않는 사람들이 문장의 의미를 ‘생각’하며 읽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그들이 글을 낭독할 때 어떤 글자나 단어, 심지어 한 줄을 몽땅 건너뛰거나 몇몇 글자를 잘못 읽을 때가 있다.
이로 인해 문장이 이상해졌거나 문장의 뜻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도 그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들이 문장을 의미 단위로 적절히 끊어 읽지 않는 원인은 명확하다.
‘읽으면서’ 문장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읽기 방식은 한 문장을 다 읽어도 그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원인과 결과가 꼬리를 물고 악순환하는 것이다.
문장을 읽을 때는 반드시, 방금 지나온 단어나 구절들을 지금 읽고 있는 단어나 구절들과 ‘연결’하여 의미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의미 단위’로 끊어 읽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팃포탯은 / 처음에 / 무조건 협력합니다. // 만약 / 상대가 / 똑같이 협력하면, / 둘 다 / 좋은 점수를 얻습니다.”
인간의 뇌가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성인의 경우 5~9 청크, 초등학생의 경우 3~6 청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청크란 정보의 ‘덩어리’로 이해하면 된다.)
사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전화번호를 불러줄 때 ‘01038256987’, 이렇게 열한 개의 숫자를 한꺼번에 말하지 않는다.
‘010 3825 6987’, 이렇게 ‘세 덩어리’로 끊어 말한다.
우리가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 덩어리의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일명 ‘작업 기억’이라 불리는, 이 정보 처리 능력의 한계는 우리가 글을 ‘의미 있는 덩어리’로 끊어 읽어야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원인이다.
이렇게 의미 단위로 끊어 읽으며 덩어리들의 의미를 종합하는 ‘사고’를 작동시키며 읽을 때 한 문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독자 님들은 당연한 얘기 아닌가,라며 의아해하실 수 있다.)
의미가 파악된 문장은 ‘하나의 청크’가 되어 다음 문장의 의미와 통합될 수 있는 상태로 우리 뇌에 기억될 수 있다.
그리고 의미가 파악된 문장들이 점진적으로 통합되면서 한 문단의 의미를 ‘덩어리’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의미 있는 덩어리’로 끊어 읽지 않는다면 글을 다 읽고 난 후 피상적이거나 단편적인 정보의 ‘흔적’들만이 기억을 떠돈다.
이런 독자는 기억의 바다를 이 ‘흔적’들을 엮어 뭐든, 표면적 내용을 말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들이 ‘이해’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흔적으로 엮인 표면적 내용들은 좀처럼 쓸모 있는 자원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공부는 열심히 했고 문제를 풀 때 다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성적은 안 나온다!
어떻게 해야 자녀나 학생이 의미 단위로 끊어 읽으면서 동시에 문장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의외로 쉽다!
아이들이 글자를 직접 읽게 되는 때가 오기 전에, 지속적으로, 문장을 의미 단위로 끊어 읽어주면 된다.
그렇게 읽어주는 글을 꾸준히 ‘들으면서’ 영유아기와 초등 저학년 시기를 보낸 학생들은 ‘들으면서 동시에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이 직접 글을 읽게 되고 어지간한 문자 해독 능력이 생기면, 저절로 의미 단위로 끊어 읽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영유아기부터 초등 저학년 사이에 한글책 듣기와 읽기 경험을 충분히 하는 아이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자녀 혹은 학생에게 장차 학습에 곤란을 겪지 않을 수준의 문해력을 키워주고 싶다면 부디, 우선, 들려주시라.
전자기기의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생생한 사람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이의 이해와 마음을 담아서.
(오해 마시길! 의미 단위로 끊어 읽으면 어떤 문장이든 의미가 저절로 파악된다는 뜻은 아니다. 원활한 문해력 개발에 꼭 필요한,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이가 직접 글을 읽기 시작하면 최소 1년 동안은 함께 읽어주셔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