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미는 디테일에 있다
아이들은 6~7세 무렵 글자의 소리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 무렵 많은 부모가 아이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읽어주기를 멈춘다. 읽어주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고, 아이가 직접 읽는 편이 문해력 발달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첫 번째 이유는 사실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이유는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지능이 높고 성향이 신중한 극히 일부(약 3%)의 아이들은 이 시기에 자기가 직접 읽어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약 97%의 아이들은 문자 해독 능력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 읽을 때에는 문장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기 어렵다. 2화에서 설명한 ‘작업 기억’ 용량의 한계 때문이다.
이 시기 아이들의 작업 기억 용량은 3~4 청크다. 그러니 글자에 소리를 더듬더듬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이 용량을 모두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한 글자를 읽고 다음 글자로 넘어가면, 앞 글자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다. 이런 상태에서 단어의 의미와 문장의 의미를 생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글은 문자와 소리의 대응이 비교적 쉬운 언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글자의 소리를 익혀가는 동안 단번에 문장의 의미까지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글자씩 ‘해독’하는 단계에서 적절히 끊어 읽으며 상황에 맞게 읽는 ‘읽기 유창성’을 확보하기까지는 보통 1~2년이 걸린다. 문제는 바로 이 시기에 벌어진다.
읽기 유창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이 기간 동안 아이는 문장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표면적 읽기’에 익숙해진다. 문제는 이 방식이 뇌에 자리 잡으면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읽기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읽는 속도가 과도하게 빠르며, 문장들을 건너뛰며 읽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세부 내용(디테일)에 주목할 리가 없다. 하지만, 글의 의미는 주목하지 않은 그 세부 내용에 있다.
예를 들어보자. 지능지수 140대의 초등 6학년 A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베니스의 상인』, 『이방인』 같은 고전을 완역본으로 읽는다. 한 작품을 다 읽으며 뿌듯해하며 스스로 줄거리를 말한다. 모든 내용이 정확하다. 하지만 의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베니스의 상인』을 읽은 A와 한 성인이 나눈 대화를 통해 이 점에 대해 이해해 보자.
- 성인 : 재밌게 읽었어?
- A : 네! 포샤가 샤일록에게 한 방 먹였을 때 너무 통쾌했어요. 악독한 샤일록이 안토니오를 죽이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하잖아요.
- 성인 : 그럼 작가는 샤일록이 악독하다고 생각하고 이 작품을 썼을까?
- A : 네. 그러니까 결국 샤일록이 빌려준 돈도 못 받은 거잖아요.
- 성인 :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재판 결과가 공정하다고 보았을까?
- A : 아뇨. 공작이랑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어서 샤일록에게 유리했죠. 안토니오를 죽이려고 해서 사형될 수 있었는데, 돈만 좀 잃고 끝났잖아요.
하지만 샤일록이 왜 안토니오에게 분노했는지, 이 재판이 얼마나 부당했는지 밝히는 대사가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버사니오의 다음 대사가 대표적이다.
- 세상 사람들은 항상 그럴듯한 겉모습에 속곤 하지. 아무리 추하고 썩어빠진 소송사건이라도, 재판에서 그럴듯한 변론으로 양념을 치면 그 사악한 외양이 가려져 보이지 않거든. - 출처 :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베니스의 상인』, 계명대학교출판부, 109쪽
A는 이 세부 내용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적절한 의미 해석에 실패했다. 이처럼 세부 사항을 무시하고 표면만 훑는 읽기가 바람직하지 않은 궁극적 이유는, 이런 읽기 방식이 곧 사유의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간단한 유비 추론을 통해 확인해 보자. 6학년 B와 비교하면 A의 사유 방식의 문제가 보다 분명해진다.
A와 비슷한 지능(130대)을 가진 또래 B는 문장을 천천히 읽고, 의미를 파악하고, 세부 내용을 종합하며, 글 전체에서 중요한 이슈를 찾는 연습이 잘 되어 있다. 두 학생에게 유비 추론의 개념을 안내하고 몇 차례 유비 추론 문장을 함께 완성한 후 다음 문장을 스스로 완성하게 했다.
- 아마존과 지구의 관계는 폐와 ( )의 관계와 같다.
두 학생 모두 괄호에 ‘사람’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유는 달랐다.
- A : 아마존이 지구에 있는 것처럼 폐는 사람에게 있어요.
- B : 아마존은 지구에 산소를 공급하고 폐는 사람 몸에 산소를 공급해요.
지식의 차이가 아니다. 두 학생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차이는 사유의 방식이다. 세부 내용에 주의하면서 의미를 생각하는 읽기 경험이 축적된 B는 주어진 정보의 본질적 관계를 파악하려 한다. 세부 내용에 주의하지 않고 대강의 내용만 파악하는 읽기에 능숙해진 A는 정보의 표면적 관계에서 생각을 멈춘다.
사유의 방식은 타고나기보다 길러진다. 문해력과 분리될 수 없는 사유의 방식은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글을 들으면서 형성되기 시작해, 글자 읽기에 능숙해지는 시기에 고착된다.
그러니 문자 해독에 모든 작업 기억을 사용하는 시기의 아이에게는 반드시 읽어주어야 한다. 아이가 직접 읽는 경험은 읽기 유창성 발달에 필수적이지만, 읽어주는 글을 들으면서 의미를 생각하는 경험 또한 필수적이다. 의미를 해석하고 연결하려면 작업 기억 용량에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디 최소한 초등 2학년까지는 읽어주기를 멈추지 않기 바란다. 이 시기의 읽어주기는 단지 읽기 활동이 아니라, 학습과 삶의 토대를 만드는 사유 활동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