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감정의 잔향이 다시 우리를 부르는 순간
삶의 어떤 순간은 오래전부터 이미 노래가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불린 적은 없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리듬이 존재하고, 그 리듬은 살아온 시간과 거의 같은 속도로 천천히 흘러간다.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흔히 발라드라고 말하지만, 때때로 한 사람의 인생 또한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고 느낀다. 무엇 하나 완전히 끝나지 않고, 문장들은 늘 어딘가 열려 있으며, 감정은 마침표 대신 쉼표의 형태로 남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과 후회, 사랑과 상실이 서로의 앞뒤를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이어질 때, 그 전체가 하나의 긴 노래처럼 들려온다. 그 노래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는 않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만 어떠한 진심이 남곤 한다.
시간은 늘 흘러가고 지나가는 것이라지만, 감정은 그 위를 흘러가는 또 다른 시간 같기도 하다.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감정의 온도가 남은 자리이고, 그 온도가 식지 않은 채 우리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그 감정을 다시 살아간다.
발라드는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저녁의 공기, 오래된 노트의 메모 사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필체, 한밤의 정적 속에서 천천히 꺼지는 불빛 같은 것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그것들은 마음에 남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진다.
감정이란 그런 방식으로 잔향을 남기며, 우리 붙잡기도 했다가 놓아주기도 한다.
발라드는 슬픔의 노래가 아니라 인간이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매번 무언가를 잃고, 다시금 다른 무언가를 얻어가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감정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가지만, 그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파도의 무늬가 아니라, 바닥에 스며든 염분 같은 것이다.
그 짠맛이 인생의 밀도를 만든다.
기쁨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슬픔이 너무 오래 남을 때조차, 우리는 그것들을 구분하지 못한 채 같은 감정의 선율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그 순간의 발라드가 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발라드가 있다. 어떤 이는 그 노래를 사랑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이는 그 노래를 상처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름만이 다를 뿐, 결국 모두 한 사람의 내면이 세상을 견디며 만들어낸 감정의 리듬이다.
발라드는 그 리듬이 만들어내는 흔들림이다. 우리는 그 흔들림 속에서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느끼고, 여전히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따금 들려오는 낡은 멜로디 한 조각이 그렇게 우리의 하루를 멈춰 세운다.
삶의 발라드는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직 부르지 못한 구절을 남겨두고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전에 잊은 듯한 그 노래를 다시금 흥얼거리듯 이어간다. 그 노래에는 누구의 이름도 없고, 정해진 악보도 없다. 그저 흘러가며, 다시 돌아오며, 그렇게 하나의 생을 만들어 갈 뿐이다.
인간은 시간 속을 흘러가면서도, 끝없이 같은 감정을 되풀이하고, 그 되풀이 속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조금씩 알아가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발라드는 바로 그 반복의 아름다움이다.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끝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더 진실한 노래.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서, 혹은 내 안의 조용한 구석에서 그 노래의 진동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음의 여운이 아주 느리게 퍼져나가며 또 하나의 시간을 만든다.
그게 삶이고,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결국 우리 자신이다. 세상은 그렇게 들리지 않는 발라드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조금씩 흔들려가며, 아주 천천히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