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_ 마음이 귀가 되는 순간

사라진 소리를 다시 듣는 기억의 감각에 대하여

by Evanesce

Auralize [ ɔ́:rəlàiz ]

1. 마음으로 듣다, 음을 상상하다, 청각화하다


우리가 잊는 것은 언제나 소리부터이다. 한 사람의 얼굴, 손끝의 감촉, 그가 남긴 문장보다 먼저 그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진다. 기억 속에서 소리를 되살린다는 건, 그 사람을 다시금 불러내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


눈으로 보는 기억이 정지된 이미지라면, 귀로 떠올리는 기억에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건 시간의 결을 따라 흘러가고, 한때의 공기와 온도, 말의 속도까지 다시금 기억으로 불러온다. 그렇게 나는 종종 마음의 귀로 그 사람의 소리를 다시 그려보곤 한다.


소리를 상상한다는 것은 단순한 회상에 그치지 않는다. 마치 감정의 숨결을 더듬는 일에 가까운 것이다. 나를 부르던 그 음색, 말을 멈추기 직전의 숨소리, 아무 말 없이 함께 있던 공간의 조용한 틈새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파동으로 남아 있다가 어느 날 불현듯 현실의 어느 순간과 겹쳐진다.


누군가의 웃음 뒤에 남은 여운, 혹은 새벽의 냉기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 같은 것들로 마음이 청각의 방향으로 열린다. 눈이 아닌 귀로 기억을 보는 것, 들리지 않는 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다.


소리에는 형체가 없다. 그래서 가장 먼저 사라지고, 또 가장 오래 남는다. 그 사람과 헤어진 이후에도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공기 속에 희미하게 잔류한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마음은 그 불가능을 오랫동안 버티며 유지한다. 잊지 않으려는 의지라기보다,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의 또 다른 표현에 가깝다.


기억은 시각보다 청각에 오래 머무른다. 눈이 본 것은 시간에 닳지만, 귀로 들은 것은 마음의 결에 스며든다. 그 결은 파문처럼 남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따금 그 소리를 그려본다. 종이에 선을 긋듯, 마음의 안쪽에 파동을 그려낸다. 누군가의 목소리일 때도 있고, 내 안에 오래된 말 한마디가 되살아날 때도 있다. 어떤 기억은 여전히 명확한 음정으로 남기도하고, 어떤 것은 흐릿한 잡음처럼 번지게 들린다. 그러나 그 소리는 모두 나를 이루는 것이기에 명확하게 듣지 못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으로 듣는다. 그 사람의 침묵 속에서, 그때의 공기 속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잔향을 더듬는다. 그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다시 존재를 만들어내는 창조에 가깝다.


청각화한다는 행위는 결국 시간의 상실을 견디는 한 인간의 방식이다. 우리가 들었던 소리는 어딘가에서 다시 들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건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잊힌 것들 속에서도 여전히 그 형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눈으로 기억되지만, 마음은 귀로 기억한다. 한때의 목소리, 익숙한 숨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 고요한 틈까지 모두 모여 한 사람의 흔적을 이루고,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울려온다. 그 울림이 지속되는 한, 어떤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소리들을 마음으로 재생한다. 아직 그 사람을 기억하며 그 당시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는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아무 소리도 없는 곳에서 그 음성을 들어본다. 그건 과거의 목소리이자, 지금의 나를 이루는 가장 은밀한 리듬이기에.


들리지 않는 것을 다시 듣는 청각화를 통해, 오늘도 마음이 귀가 되어, 어쩌면 사라져 가는 모든 소리를 조용히 불러내 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