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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묻은 삿포로의 색

홋카이도(北海道) ²삿포로 1

by 이듭새



이른 오전 하코다테역.


이른 아침부터 하코다테를 떠나는 아쉬움이 싫지만은 않은 것은 새로 만날 새로운 장소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크기 때문이겠지. 홋카이도의 또 다른 곳으로 간다.






하코다테(函館)에서 삿포로(札幌)까지 가는 호쿠토(北斗) 3호.


하코다테에서 삿포로까지 운행하는 특급열차를 탄다. 최고 속도는 120km/h로 도쿄에서 하코다테까지 타고 왔던 하야부사가 만큼 빠르지는 않다 보니 이동 거리는 훨씬 짧은데도 소요 시간이 4시간 남짓으로 비슷하다.






호쿠토 3호 내부. 좌석은 2 / 2.


기차에 탑승해서 티켓에 적혀있는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더듬더듬 걸어가는 순간마저도 즐겁다.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었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설렘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또 괜히 귀해지는 거다. 이 짧은 순간들이 전부.






열차 밖 풍경.


달리는 열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공기도 적당히 차가울 것 같고. 들판에선 풀냄새도 살살 날 것 같고. 하늘이 맑으니 내리쬐는 해도 뜨겁지 않을 것 같은. 열차 창문을 액자 삼아 살아있는 그림을 구경하는 움직이는 열차 미술관.






일본 3대 환락가라는 스스키노(すすきの) 거리.


삿포로역 근처에 숙소를 잡을까 하다가 그래도 밤거리 활발하다는 스스키노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밤에 얼마나 번쩍거리길래 낮은 이렇게까지 조용한지 신기할 정도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조금 얼떨떨.


삿포로에 와서 보는 삿포로 맥주 간판을 보고 새삼스럽게도 아 여기가 그 삿포로구나. 본고장이구나. 두리번두리번. 익숙한 듯 사실은 낯선 거리를 걷는 내내 내가 정말 삿포로에 왔구나.





빅쿠리동키 타누키코지점(びっくりドンキー狸小路店).


삿포로의 첫 식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내가 바이토로 일했던 곳은 도쿄지만 본사는 홋카이도인 빅쿠리동키. 메인 메뉴인 함바그도 그렇지만, 소프트크림이 무척 먹어보고 싶었다. 원래도 맛있는 소프트크림이 고향에서 뽐내는 맛은 과연 어떨까. 어떻긴. 기대를 이따만큼 했는데도 저따만큼 맛있는 맛.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데 어떻게 꼭대기까지 기대가 치솟은 상태에서 먹었는데도 이렇게 말도 안 나오게 그 치솟은 기대의 이상일 수 있는지. 순전히 내 취향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내 입을 통해 들어가는 것인데 내 기준이고 내 취향인 게 당연하니까. 홋카이도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맛있는 소프트크림을 먹으며 살아가는 거구나. 복 받은 사람들.






나카지마 공원(中島公園)에 담뿍 묻은 가을.


삿포로에는 큰 공원들 중 산책 겸 찾았던 나카지마 공원(中島公園). 삿포로의 가을을 또 이렇게 만끽할 수 있다니. 공원 입구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서 바라볼 때부터 이미 눈앞이 노란색이었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가을의 삿포로에 잘 왔다며 반기듯 노릇노릇.






나카지마 공원 산책.


자연으로 눈이 즐겁다는 걸 느낄 때의 만족감은 무척 높고 그 높은 만족감은 꽤 오랜 시간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눈으로 봤던 풍경. 코로 맡았던 냄새. 피부로 느꼈던 공기. 오감에 다채롭게 선사하는 감정의 축제처럼.






나카지마 공원 산책.


공원 곳곳을 거닐며 사진으로 몇 장 담으려고 했을 뿐인데. 한 장이 두 장이 되고 두 장이 다섯 장 다섯 장이 열 장.......






나카지마 공원의 쇼부 연못(菖蒲池).


도심 속에 이렇게 큰 공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덩이인데, 그 복덩이가 입이 벌어질 정도로 훌륭하다면 복덩이 더하기 복덩이지.


나카지마 공원 안에는 쇼부 연못이라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그 연못을 따라 산책로가 잘 되어있고 나무도 우거져있어서 근처에서 쉬기도 좋고 걷기도 좋다. 관리도 수시로 잘 되고 있는지 나무도 풀도 지저분한 것 없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산책하는 곳곳마다 관리하는 분들께서 낙엽을 모아 치우거나 잔디를 깎거나 하고 계셨다.






나카지마 공원 쇼부 연못 앞의 단풍 나무.


노릇노릇한 입구를 거쳐 푸릇푸릇함을 거쳐 불긋불긋함을 만났다. 공원의 색이 다채로운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가을의 홋카이도를 선택하길 참 잘했다고.






나카지마 공원 산책.


한참을 거닐어도 발이 닿는 곳마다 새롭고 눈이 닿는 곳마다 즐거운 공원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자연이 주는 감사함을 느끼게 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런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니 사사로운 것부터 참 귀하고 기쁘다.






사과껍질 같은 낙엽.
나카지마 공원의 단풍.


멀리서 보고 사과 껍질을 깎아놓은 것 같다고 소리치곤 무작정 달려가 눈에 담고 사진에 담았던 낙엽. 은행나뭇잎과 단풍나뭇잎이 섞여있는 모습이 절경이었다.


한동안 단풍을 보지 못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는 건지 눈이 쨍하게 부실 정도로 빨갛고 선명한 단풍을 실컷 봤다. 비가 올 것처럼 흐렸던 하늘도 공원을 산책하는 동안에는 파랗고 청명했다. 이제 여행 앞머리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선물을 많이 받아도 되는 걸까. 이 커다란 여행이 내게 주는 선물은 곧 꾸러미가 될 것 같다.






스미비 이자카야 엔(炭火居酒屋炎)
나마츠쿠네(生つくね)와 토리카와쿠시(砂肝串)
나마츠쿠네 시오챤코 나베(生つくね塩ちゃんこ鍋)


간단히 맥주로 목을 축이자 하는 생각으로 우연히 들어간 곳이 맛있을 때의 쾌감은 여행의 큰 묘미다. 나마츠쿠네라고 쓰여있는 것에 혹해서 들어갔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싱글벙글. 아직 사람이 붐비기 전의 시간대에 빠르게 입장 후 야금야금 시켜서 호로록 먹고 사람이 많아질 즈음 다시 빠르게 퇴장하는 짜릿함. 사람들 부대끼는 것이 싫은 우리들의 어중간한 시간 권법.






스스키노의 밤과 아침.

도대체 다 어디 있다가 나타나는지 해가 지고 깜깜해지니 길거리에 사람이 무척 많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또 거짓말처럼 다 사라지고 없다. 내 안에서 삿포로에 관한 문제를 낸다면.


Q. 낮엔 없고 밤에는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A. 사람입니다.







밥을 먹는 도중에 생겨버린 아침 식사 쿠폰.


밝은 삿포로의 밤을 보내고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아침. 간단히 조식을 먹으러 들어간 규동가게에서 뜻밖의 친절을 만났다.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에 한국인 모녀가 식사 중인 것이 보였다. 두 분은 이제 식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떠나는 날인 것 같았고 그냥 그런가 보다 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주문한 음식이 나와 밥을 먹는 중. 갑자기 테이블 위에 쓱 올라오는 종이쪼가리 하나. 아까 그 건너편에 계시던 모녀 중 따님께서 아무런 말도 없이 슬그머니 종이를 내려놓고 빠르게 몸을 돌려 나가셨다. 머릿속에 찍힌 물음표 하나가 두 개 세 개가 되었을 땐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이미 두 분이 가게를 나간 후였고, 짝꿍과 나는 둘이서 이게 뭐지? 어? 뭐였지 방금? 서로 얼굴을 보고 다시 테이블 위의 종이를 보고.


따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가신 종이는 당일 한정으로 조식을 200엔 할인받을 수 있는 쿠폰. 아마 계산 후에 받으신 것 같은데 본인들은 이제 사용하지 못 하시니 한국어로 대화 중인 우리를 보고 주고 나가신 것 같았다.


너무 순식간이라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했고 얼굴도 못 봤고 당황과 웃음이 공존하던 아침. 그냥 버릴 수도 있는 것을 건네주신 수줍은 용기와 따뜻한 정(情)을 우리나라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삿포로 한복판에서 받았다. 재미나고 신기하고 기분 좋은 선물.






삿포로역 근처.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위해 또 열차를 타는 날. 처음 삿포로에 도착했을 땐 숙소가 있는 스스키노까지 전철을 타고 이동했다. 가는 길이 어떨지 몰라서이기도 하고 거리도 감이 잡히지 않으니 짐을 끌고 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는데. 하루 좀 걸어봤다고 어느 정도 감이 잡혀서 이번에는 숙소 체크아웃을 후 삿포로역까지 걷기 시작했다. 레일 패스로 하는 여행이니 될 수 있는 한 교통비는 더 지불하지 말자는 것이 목표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삿포로에서 스스키노까지 이동하는 난보쿠센은 JR이 아니기 때문에 레일 패스로 탑승할 수 없다.)


다행히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깨끗. 바람은 제법 불었지만 덥지도 춥지도 않고. 삿포로의 가을을 아주 만끽할 수 있는 걷기 좋은 날씨였다.






삿포로 테레비 타워(さっぽろテレビ塔).


어릴 적 나는 전신주처럼 생긴 것을 보면 무조건 에펠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내 부모님은 어린 자식의 말이 귀여워서 장난을 치고 싶으셨던 건지 그 동심을 지켜주고 싶으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도 그건 에펠탑이 아니라는 말을 하신 적이 없어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고 생각했더랬다. 사람들이 관광하러 가는 그 에펠탑이, 우리나라에는 국도만 달려도 이렇게 엄청나게 많으니까.


삿포로역에 가까워졌을 즈음에 횡단보도를 건너며 볼 수 있는 이 삿포로 에펠탑은 바로 삿포로 테레비 타워(さっぽろテレビ塔)다. 위에는 전망대가 있어서 시내를 360도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한 번 가볼 걸 하고 이제 서야 생각하는 건 당시에는 저게 삿포로 테레비 타워인지 모르고 정말로 삿포로 에펠탑, 그러니까 아주 큰 시계가 달린 전신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광지를 찾아다니기보다 그냥 발 닿는 대로 걷는 편인데. 계획보다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면 이렇게 놓치는 것이 많다. 물론 모두가 아는 관광지를 놓치는 만큼 모두가 모르는 곳에서 얻는 것들도 많고. 나는 그게 좋으니 됐고, 여행 짝꿍 역시 나와 같으니 다행이지.






삿포로역(札幌駅).


드디어 도착한 삿포로역. 처음 왔을 땐 역 안에서 이동했으니 밖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본다. 야무지게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와 이어져있으니 관광객도 많고 유동인구도 많고. 날 밝을 때의 스스키노에 사람들이 없는 건 전부 삿포로역에 있어서인가 싶을 만큼 사람들이 많다.


도착한 날에도 잠시 떠나는 날에도 삿포로에는 가을이 가득 묻어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두텁게 쌓인 눈이 가득한 하얀색으로. 혹은 향기롭게 하늘거리는 라벤더의 보라색으로 기억될 삿포로. 그럼 나에게 기억될 삿포로는 어떤 색일까.


내게 짙게 묻은 삿포로는, 노르스름하고 불그스름한 색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아직은 코끝을 발갛게 만들기보다 시원한 맑음을 들이키게 하는, 청명한 가을의 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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