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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라는 선물

홋카이도(北海道) ¹하코다테

by 이듭새



처음이었던 도쿄역 플랫폼.


도쿄역에서부터 출발하는 커다란 여행의 시작. 첫 도쿄역에서 첫 홋카이도를 향하는 첫 기차를 탄다.


처음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게 처음은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선물이 되곤 하기에. 선물이 되는 의미부여라면 양껏 마음껏 언제든지 해주겠노라 다짐한다.






도쿄에서 하코다테까지 4시간. 아주 빠른 하야부사(はやぶさ). 생애 첫 신칸센.


첫 목적지는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하야부사의 종착역은 하코다테역이 아니라, 신칸센역인 신하코다테호쿠토. 거리는 약 820km 정도 된다고 한다. 그 거리를 4시간 정도에 간다니. 상상만으로는 조금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하야부사 내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쾌적했던 하야부사의 내부. 좌석도 넓고 벽면부터 조명까지 전체적으로 밝아서 답답하지 않았다. 4시간을 가야 하는데 괜찮을까 했던 걱정이 사르르 녹을 정도로 좋았다. 아마 앞으로 타고 다닐 기차들 중 얘가 가장 좋지 않을까? 이런 좋은 기차는 처음이자 마지막인가? 하며 우스갯소리를 했던 기억.






처음으로 사본 에키벤(駅弁)들.


기차 여행을 시작하기 전 계획을 짜며 했던 말. 에키벤이 이 여행의 묘미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오히려 에키벤이 유명하다는 작은 역 위주로 돌면서 다녀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더랬다. 하지만 도쿄역에 있는 많은 에키벤을 둘러보고 그중 몇 가지를 골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지고 기차 안에서 열었을 때, 에키벤의 묘미라는 명제가 쏙 들어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상상하던 도시락이 아니었다. 그냥 도시락이었다. 차가울 때 먹어도 맛있기 위해 여러 조리법으로 조리된 것은 신기했지만 그냥 도시락이었다. 나는 멋대로 뭘 상상했던 걸까. 에키벤은 죄가 없다. 멋대로 기대치를 올렸던 내게도 죄가 없다. 그저 에키벤은 경험이었던 거다. 경험해 봤으면 됐지.






신하코다테호쿠토(新函館北斗)에서 하코다테(函館)로 가기 위한 사람들.


이번 역은 종착역인 신하코다테호쿠토역입니다. 드디어 도착했다는 기쁨과 설렘 덕인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신칸센에서 내렸다. 처음에 예약할 때부터 이름이 제법 특이한 역이라고 생각해서 조금 찾아본 정보.


2016년에 홋카이도 신칸센이 개통될 당시 역이름을 짓는 것에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하코다테시에서는 신하코다테 혹은 신하코다테호쿠토라는 이름을 주장했고 호쿠토시에서는 호쿠토하코다테라는 이름을 주장했다고. 이 갈등이 길어지자 홋카이도 도청이 중재에 나섰고 그 중재 하에 타협한 결과가 바로 신하코다테호쿠토라고 한다. 특이하다 생각했던 이름이 하코다테 더하기 호쿠토였다니.






하코다테라이너(はこだてライナー) 안에서.


신하코다테호쿠토에서 하코다테까지 가기 위해서는 하코다테라이너(はこだてライナー)를 탑승한다. 방금 하야부사에서 내린 우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하코다테라이너를 타러 가기 위해 이동했으니 현지 탑승객보다 여행객이 압도적으로 많은 열차 안. 여섯 정거장밖에 안 되는 정거장은 그나마도 쾌속으로 탑승하면 달랑 세 정거장이다. 그 찰나를 한 번씩 눈에 담을 때마다, 아 정말 왔나. 여기가 말로만 듣던 홋카이도인가. 들뜨는 마음.






하코다테라이너의 문 열림 버튼.


열차의 문을 직접 열고 닫을 수 있는 버튼마저도 신기한 홋카이도의 처음.






하코다테역(函館駅).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딛는 순간의 호기심과 얼떨떨함이 한데 공존하는 마음은 좋은 의미로 붕 뜨곤 한다. 방황하거나 익숙하게 찾아가는 캐리어 바퀴 구르는 소리. 사방에서 부산스럽게 퍼지는 달리거나 걷는 발소리. 삼삼오오 모였거나 휴대전화를 든 말소리. 온갖 소리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몸소 느낀다. 어서 오세요, 하코다테에!






카니노홋카이도(かにの北遊)의 이치젠동.


원래 가고자 했던 음식점에 가지 못 해도 괜찮다.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언젠가 또 와서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즐거운 아쉬움으로 남겨둔 곳이 하코다테에는 두 군데나 있다.


대신한 곳이 만족스러웠다면 아쉬움이 준 선물일 테고. 역시 가고 싶었던 곳에 갔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면 언젠가 있을 다음을 기약하는, 내 마음과 미래에게 하는 합법적인 약속이 되고.






하코다테의 11월은 가을이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걷는 한적한 길은 즐겁다. 그 길 다음에 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안은 채라면 더욱이. 가을을 머금어 노릇한 나무들이 주는 선물일까.


지금이 아니라면 홋카이도의 가을을 언제 느껴보겠느냐는 마음으로 여행의 시작을 홋카이도로 정했다. 언젠가 다시 홋카이도를 찾는다면 그땐 여름이나 겨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홋카이도의 가을을 만나고 싶었다. 또 한동안 꽁꽁 얼어있을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을.






홋카이도는 역시 소프트크림.


홋카이도산 유제품은 훌륭하다. 우유도 치즈도 아이스크림도. 홋카이도가 본사인 레스토랑 체인점에서 일을 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다. 지금 내가 그 본고장에 와있다. 어디서 먹더라도 실패가 없을 거라는 마음 든든함. 홋카이도에서 맛보는 첫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어땠습니까, 정답이었습니까? 네, 훌륭한 정답이었습니다.






럭키피에로(ラッキーピエロ) 마리나스에히로점(マリーナ末広店).


하코다테에만 있다는 럭키피에로(ラッキーピエロ). 근처를 걷다보면 본점도 있고 여러 지점이 있지만, 아카렌가 근처를 산책하느라 자연스럽게 그 근처에 있는 지점에 들어갔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는 마리나스에히로점.






럭키피에로의 1등 메뉴 차이니즈 치킨버거(チャイニーズチキンバーガー).


식견을 넓히다는 말의 식견은 識見이 아니라 食見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상엔 아직도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다. 흔히 보는 재료로도 새로운 맛을 창조해 내는 것들. 이런 맛도 낼 수 있구나.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아직도 내 음식의 세상은 협소하다.


원래도 맛있는 음식의 색다른 맛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에 새로운 세상을 본다. 햄버거 빵 사이에 낀 통통하고 촉촉하고 짭조름한 치킨을 씹으면서 또 나의 식(食)견이 넓어졌다.






BAY 하코다테.


여행이라는 건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마련이다. 올려다본 하늘이 파랗고 맑으면 간간이 담는 사진이 그림 같고.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선선한 바람이 함께라면 걷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지만. 이 커다란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무기는, 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날씨에 영향을 안 받는다는 것에 있다. 시간? 많고요. 계획?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으면 좋고요. 날씨는? 관계없습니다.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는 대로. 이 시간에 지금 내가 여기에 왔다는 것. 있다는 것.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기는 중이라는 것. 하늘이 파랗게 맑지 않아 그 아래 건물이 돋보이고, 해가 쨍하게 뜨겁지 않아 선선한 바람을 만날 수 있는 것. 이번 여행으로 내가 배우는 것들이다.






코메다커피점(コメダ珈琲店).


커피를 파는 곳은 보통 카페라고 하지만, 카페보다는 예스러운 분위기가 강한 킷사텐(喫茶店)이라는 곳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방. 다방과는 살짝 차이가 있는 것 같다가도 역시 그 표현이 최선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아이치현(愛知県)에는 카페를 찾는 사람들보다 킷사텐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아이치현 중에서도 특히 나고야에 킷사텐의 수가 굉장히 많다고 하는데, 그 나고야에서 시작해 현재는 전국에 1,000개는 훌쩍 넘는 지점이 있는 코메다커피점(コメダ珈琲店). 카페보다는 킷사텐이라는 말이 더 잘어울리는 곳이다.






코메다블랜드(コメダブレンド), 오구라토스트(小倉トースト).


커피도 커피지만 꽤 유명한 것은 토스트. 코메다커피점의 식빵이 무척 맛있다더라. 팥은 무척무척 맛있다고. 그리고 기본적으로 맛있는 버터도 있다. 그럼 무척 맛있는 식빵과 무척무척 맛있는 팥과 기본적으로 맛있는 버터가 합쳐지면 얼마나 맛있을까. 얼마나 맛있냐면요, 앞으로의 여행에서 코메다가 보이면 무조건 들어가고 마는 선택을 할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백 점이세요.






하코다테항(函館港)의 저녁.


마음만 먹으면 바다를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지내다가 그 환경과 작별하니 바다를 볼 기회 자체가 귀해졌다. 시원하게 철썩철썩 하얀 거품 토해내는 파도정도는 있어야 바다지! 하는 마음이 얼마나 경솔하고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 어슴푸레하게 저녁 하늘 머금은 잔잔한 항구만 봐도 이렇게나 좋은데 말이다.






도로 위를 달리는 노면전차(路面電車).


우리나라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노면전차를 만나면, 아 내가 지금 외국에 나와있구나. 한다. 장난감처럼 도로 위를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다이몬요코쵸(大門横丁)에 있는 로바타 다이보우(炉ばた 大謀).


구글맵으로 현지인 맛집 찾기의 달인인 짝꿍의 홈런. 우연히 찾아 들어갔는데 맛이 성공적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우리의 식견이 자꾸자꾸 넓어지는 것이 뿌듯하다.


밖에서 봐도 작아 보이는 가게 안은 테이블석 없이 바석만 총 여덟 개였다. 이미 반 정도는 좌석이 차있길래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떨림은 나름의 용기였던 기억.






부드러운 야리이카(ヤリイカ)와 내장, 어떤 생선의 사시미(刺身).


꼴뚜기를 회로 먹는 건 일본에서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살살 녹는 야리이카를 함께 나온 내장에 찍어 먹었는데 이게 또 별미다. 별미야 별미. 눈에 별이 박힐 것 같은 맛있음에 웃음이 절로 나는 별미.


현지인 아저씨들만 가득이라 괜히 쭈뼛대며 주문을 하고, 가게가 좁으니 둘이서 대화도 소곤소곤 조용히 했는데. 먼저 와서 마시고 계시던 단골손님으로 추정되는 아저씨 한분께서 말을 붙여주셨다. 어쩌다 보니 또 쭈뼛쭈뼛 대답하기 시작.


한국에서 왔고 일본 전역을 기차로 여행하는 첫날이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더니,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스고이네! 이이네! 하시던 아저씨께서는 본인이 주문한 안주 접시를 우리에게도 맛보라며 주시기도 하고. 그 아저씨께서 말을 붙여주시니 다른 아저씨들도 말을 걸어주시고. 아저씨들 사이에서 쭈뼛거리던 우리. 하지만 웃음이 가득했던 신선한 경험. 그리고 그것이 꽤 좋은 추억이 된 지금. 처음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또 선물이다.






하코다테 마루카츠 수산 본점(函館まるかつ水産 本店)의 스시.


홋카이도의 스시 네타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들어서 기대를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 다름을 느끼기에는 회전초밥 가게에 들어간 시간이 너무 늦었을 때였다. 이미 문을 닫기 직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게 먹었으나, 먹고 싶었던 즈케마구로를 먹지 못 했던 것과 너무 늦게 방문하는 바람에 네타의 신선도가 많이 떨어졌었을 것임이 아쉬웠던 밤.






맨홀 뚜껑마다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믿는 미신 같은 것이 하나씩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 어린 시절에 들어와 푹 박힌 채 30대를 꽉 채워가는 현재에도 나갈 생각을 않는 미신 하나는, ‘맨홀 뚜껑을 밟으면 재수가 없으니 밟지 말 것. 피하려고 했으나 피하지 못 하고 밟았을 때에는 머리카락을 만져라.’이다. 도대체 어디서 들었던 미신인지도 모르겠고 누구한테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내가 찝찝해선 아직도 맨홀 뚜껑만 보면 피하거나 폴짝 뛰어넘거나 한다.


그런 내가 가진 미신을 즐겁게 해주는 일본 거리의 곳곳이 새삼 반가웠다. 지역마다 맨홀 뚜껑에 그 지역을 대표하는 것들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서 보일 때마다 종종 사진으로 남겨뒀는데 이제 와서는 봤던 모든 맨홀 뚜껑의 사진을 담아두지 않은 것이 아쉬울 지경이지.






늦은 시간에는 대부분 닫혀있는 하코다테 아침시장 히로바(函館朝市ひろ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흐리흐리하더니 기어코 비가 내리던 하코다테의 선선하고 한산한 가을밤은, 빗물에 머리카락이 젖는 만큼 즐거움에도 함께 젖었더랬다.






하코다테의 명물이라는 야마카와목장(山川牧場) 병우유.


워낙 우유를 좋아하는데 홋카이도의 우유라니 아니 살 수 없지 않겠는가. 하코다테에서 유명한 야마카와목장(山川牧場)의 우유. 귀엽게도 동글동글 병에 들어있다. 부드럽고 진한 우! 유! 의 맛. 아무리 생각해도 홋카이도의 유제품만으로도 나는 홋카이도에 다시 가야 된다. 아주 진지한, 굵은 궁서체로 된 생각이다.






호로요이 하피쿨사와(ほろよい ハピクルサワー).


일본에서 처음 마셨던 호로요이는 단연 시로이사와(白しろいサワー)였다. 아직 칼피스가 뭔지 몰랐던 시절에 먼저 접했던 하얀 호로요이는 아주 사알짝 술맛이 나는 밀키스에 가까웠고, 그 후로 점점 몸집을 불려 가는 호로요이 군단을 보면서 계절마다 한정으로 나오는 제품들을 기대하곤 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마시게 된 호로요이는 하피쿨사와(ハピクルサワー). 시로이사와가 칼피스라면, 하피쿨사와는 요구르트에 가깝다. 여행 중이 아니라 현지에 살고 있었다면 얼음을 잔뜩 넣은 컵에 부어서 쭉쭉 마시고 싶었다. 다음에 일본에 방문했을 땐 또 어떤 새로운 호로요이들이 있을까.






이틀간 지냈던 호텔, 플렉스스테이 인 하코다테 스테이션의 복도.


호텔 체크아웃이 항상 아쉬운 것은 여행의 끝을 알리는 알람 같은 것이라 그렇겠지. 하지만 이 커다란 여행은 여기서 또 멋지게 무기를 하나 더 장착한다.


이번 호텔의 체크아웃은 다음 호텔의 체크인을 준비하는 알람. 끝이어도 끝이 아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여행에서는 즐거움도 기대도 설렘도 아주 자비롭다.






호텔 건물 밖에서 바라본 하코다테역.


도쿄역에 들어가 플랫폼에 서본 것도 처음이었고, 그 플랫폼에서 기다려서 신칸센을 타본 것도 처음이었다. 신칸센 안에서 에키벤을 먹어본 것도, 홋카이도에 발을 디딘 것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여행의 시작이 어찌나 기대와 설렘과 만족으로 넘실거렸는지. 앞으로의 일정도 길지만 그 긴 일정이 짧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이, 혹은 날이 오겠지.


처음이라는 것이 주는 선물이 기쁜, 성공적인 첫 발자국이었던 하코다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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