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끝 앞에서

살아남은 내가 비로소 알게 된 것들

by 평범한 보건교사

살아야 할 의미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태어나서 살고, 하루를 견디고, 그 안에서 그럴듯한 의미를 조금씩 붙여가며 살아가는 것.
아마 인간의 삶은 그런 형태에 가까운 게 아닐까—
나는 오랜 시간을 돌아 오늘에서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때 나는, 살아가는 일이 너무 벅차서
죽음이 오히려 편안함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 번이나 죽음을 선택했고, 두 번 모두 살아났습니다.
놀랍게도 그때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허탈함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은 나를 깊은 허무 속에 밀어 넣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묘한 깨달음을 남겼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내가 선택한다고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화가 났던 적도 있었습니다.
내 뜻과 다른 방향으로 나를 끌어올린 사람들을 원망했고,
‘왜 나를 살렸느냐’며 울며 분노하던 날도 있었습니다.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선택한 죽음조차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 억울하고, 서러웠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나는 문득 죽음의 문턱에서 느꼈던
차갑고 압도적인 공포를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아주 작게, 조용하게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죽음이라면 평안하겠지’라고 생각해 내린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식을 잃기 직전 남아 있던 감정은 평안이 아니라 살고 싶다는 본능과 죽음이 다가오는 공포였습니다.

두 번째 시도는 더 왜곡된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내 삶이 평안해지려면 죽음이라는 과제를 ‘내가 성취해야 하는 미션’처럼 느꼈던 때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때의 공포를 알고 있었기에 그 구간을 넘는 것이 ‘용기’라고 착각하며, 그 두려움과 공포의 구간을 견뎌내면 평온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저는 "죽음이 곧 평안"이라는 근거 없는 가설을 믿으며, 이를 합리화하고자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비합리적 신념 체계가 옳다고 여겼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큰 오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당시,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께 "자살 시도를 '용기'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지적을 들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용기"라는 단어는 생존과 성장을 위한 투쟁에 사용되어야 하며, 자기 파괴적 행위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언어 사용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사후 세계의 평안 여부는 증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라며, 죽음을 고통 해결의 수단으로 보는 태도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신념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알려 주셨지만, 그때의 나는 그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습니다.


결국 비합리적인 신념의 흐름대로 나는 두 번째 끝을 향해 다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나는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끝을 다시 맞을 용기가 없어서....

죽음이 다가올 때의 짓누르는 무거운 공포감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사는 고통보다 죽음이 다가올 때의 공포가 두려워서 마지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날들이 쌓이면서 나는 아주 작은 변화들을 알아차렸습니다.

나는 아직도 삶의 의미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지 않으려 애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일의 의미를 알 수 없다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거창하지 않은 삶,
정답을 알지 못해도 살아가는 하루,
그저 오늘을 무사히 통과하는 일.

어쩌면 인간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주 작은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봅니다.
살아남았으니 살아가는 것, 그 단순한 사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줍니다.

두 번의 끝 앞에서 내가 배운 건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때로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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