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실의 빛을 다시 발견하는 날들

일상 속 작은 변화들이 나를 이끄는 방식

by 평범한 보건교사

1. 어느 날 문득, 보건실이 조금 달라 보였다

다시 일상으로 스며드는 동안,
나는 어느 순간 보건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늘 보던 공간인데도 어느 날은 드레싱 카트가
유난히 반짝여 보였고,
창문 아래 놓인 의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처럼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공간이 바뀐 게 아니라 내가 그 공간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라진 것이라는 걸.

한때는 이 방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나를 옭아매는 것 같은 숨 막힘을 느꼈는데
이제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이 공간이 나를 지켜주는 곳이라는 감각이 피어올랐다.



2. 아이들의 작은 말들이 내 마음을 기웃거렸다

보건실 문을 밀고 들어온 학생들이 무심하게 던지는 말들은
생각보다 깊이 마음을 건드렸다.

“선생님, 오늘따라 얼굴 좋아 보여요.”
“선생님이 여기 있으니까 좋아요.”
“그냥 선생님 얼굴 보러 왔어요.”

그 말들이 큰 의미는 아닐지 몰라도
내 마음의 무너진 자리 위로
작은 돌 하나, 또 하나
조심스럽게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의 평범한 말들이
한 사람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균형을 다시 잡아주고 있는지.

나는 그 말들에 감사함을 새겨 넣으며, 내 마음속에 고이 접어 넣었다.



3. 다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나는 한동안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길잡이가 되어줘야 하는 ‘어른’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했다.

무너진 적이 있는 사람, 삶의 끝에서 흔들린 적이 있는 사람은 어른이 되기에 부족한 존재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어른이라는 것은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져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작은 상처를 돌보고 치료하면서
나는 나의 상처를 조금씩 다시 꿰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다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4. 보건실의 시간이 나를 천천히 회복시켰다

보건실에서의 하루는 늘 비슷했다.
학생들의 응급처치, 건강 상담, 밀려있는 행정업무
학생들의 잠깐의 장난들.. 그리고 다시 닫히는 문.

그 반복되는 시간 안에서 내 감정도 조금씩 정돈되기 시작했다.

늘 바쁘거나 특별하지 않아도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귀한 회복의 시간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고, 열을 재고,
힘들다는 아이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마음도 함께 정리하고 있었다.

보건실은 내가 다시 숨 쉴 수 있도록
조용히 속도를 맞춰주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5. 작은 빛이 길을 다시 찾게 만들 때

어느 오후,
창문 너머로 들어온 빛이
보건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졌다.

나는 그 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나는 지금 살고 있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고
가만히 가라앉아만 있던 내가
이렇게 작은 빛을 ‘예쁘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변화였다.

빛은 아주 작았지만
그 빛을 느끼는 내가 달라졌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보건실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
나를 회복시키는 건
크고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이처럼 작은 빛 하나라는 것을
보건실 안에서 다시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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