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
“영주야…. 서영주! 잠깐만 기다려봐! 나랑 얘기 좀 해.”
“나는 이서하, 너랑 할 말 없어!”
“영주야……. 내 말 좀 들어봐!”
“됐어. 됐다고!!!!!”
아침을 알리는 알람이 울린다.
영주는 방금의 상황이 꿈이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악몽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우연히 전 남자친구를 만나는 꿈이라니.
심지어 쌩얼로 밖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밖은 추운 겨울이지만 영주의 몸은 땀투성이다.
“헉…헉. 또 이서하 꿈이야? 나 꿈자리가 안 좋나? 요새 들어 부쩍 자주 나온단 말이지….”
“그리고 기껏 나타날 거면 쌩얼 말고 화장 좀 했을 때 나타나라고!”
그녀는 그 남자가 들었으면 웃었을 조금의 투정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출근하고 바쁜 오전 업무시간을 보내고 영주가 고심하고 고심하던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학교 다닐 때부터 점심 먹으러 학교 다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점심에 진심은 그녀는 올해 32살이다.
오늘은 외근을 나간 다른 직장동료들을 두고 그녀의 입사 동기인 선아와 단둘이 점심시간을 즐겼다.
8년을 함께한 그 남자와 이별 이후, 단발머리만 고집하던 영주와 달리 긴 머리만 고집하는 선아.
아침에 출근하기 바쁜 영주와 달리 고데기까지 꼭 하는 선아.
그런 선아와의 오늘 점심 메뉴는 연어덮밥이다.
영주의 대학 시절 피부처럼 탱글탱글한 살구색 빛깔을 띤 연어.
그 위에 와사비를 살짝 올려 그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을 때 선아는 중대 발표를 하였다.
“영주야 나 남자친구한테 프로포즈 받았다. 나보고 결혼하재.”
“뭐? 켁켁…… 진짜로? 선아야!!!!! 축하해!!!!!!!!”
“아. 오선아 내껀대. 이제 다른 사람한테 가는 건가.”
선아의 중대 발표에 살짝 놀라, 사리가 걸린 영주는 당황하지 않고 선아를 축하해줬다.
“있지 나보고 자기랑 결혼하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는거 있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런 말 잘하더라.”
“킥킥. 세훈씨 멘트 공부좀 더 해야겠는데”
연어덮밥과의 전투를 잠깐 멈추고, 둘은 한참을 웃었다.
“킥킥. 하여튼 문세훈 내가 지켜보겠다고 했어.”
“와 둘이 진짜 오래됐잖아. 이제 곧 10주년 아니야?”
“와… 그렇게 들으니 나랑 문세훈 세삼 오래되긴 했네.”
나와 서하처럼 선아 역시 대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연애를 하였다.
갓 전역을 하고 복학생이었던 세훈씨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연히 선아를 만났으며, 선아에게 첫눈에 반했다.
학창 시절 별명이 반달가슴곰이던 그는 듬직했다. 그 듬직함이 선아 역시 좋았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쑥맥이던 그는 1년 동안 짝사랑만 하였다.
그런 그가 선아는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귀여웠다고 한다.
둘의 사랑은 4월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던 봄에 시작되었다.
선아는 일하던 곳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했다. 그리고 돈도 받지 못했다.
술자리에서 세훈에게 이를 털어놓자 세훈은 선아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선아 몰래 그녀가 일하던 곳에 가서 사장과 담판을 짓었다.
사장은 반달가슴곰의 덩치에 위축되었으며, 순순히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
세훈은 사장에게 돈도 돈이지만 선아에게 사과하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선아는 그동안 밀렸던 돈과 사장의 사과를 받았다.
선아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생각하다 세훈이 떠올랐다.
평소같이 담담한 줄 알았지만, 선아의 말을 듣고 화가 난듯한 세훈의 표정이 떠올랐다.
선아는 갑자기 반달가슴곰이 무척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달려갔다.
‘선배 어디야? 잠깐 얼굴 좀 보자.’
세훈은 수업중이라 선아의 메시지를 보지 못했다.
선아는 세훈이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봤다.
하지만 덩치가 산만해 어디에 있든 눈에 잘 띄는 세훈은 보이지 않았다.
“헉헉…. 이 바보 반달가슴곰 어디에 있는 거야 대체.”
오늘따라 보이지 않는 반달가슴곰을 탓하며 숨을 고르고 있자 멀리서 수업이 끝난 세훈이 보였다.
오늘 선아가 애타게 보고 싶던 그 반달가슴곰이 보였다.
선아는 달렸다. 이번에는 그 반달가슴곰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 대신 싸워 준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
“선배!!!!! 문세훈선배!!!!!!!!!”
평소 조용하던 선아의 목에서 나올 수 없는 성량이 나왔다.
세훈은 뒤를 돌아보자 자신이 1년 동안 짝사랑했던 그녀가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선아가 있었다.
무슨일이냐고 그녀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반달가슴곰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선배 토요일 날 약속 있어? 없으면… 아니 있어도 나랑 여의도로 벚꽃 구경 가자!”
벚꽃이 막 만개하기 전 그 둘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반달가슴곰은 10년 동안 한결같이 선아를 좋아했다.
선아는 세훈씨가 한번 화려하다 금방 꺼져버리는 폭죽 대신 오랫동안 천천히 타는 모닥불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모닥불은 10년 동안 선아를 따뜻하게 해줬다.
그 사람의 한결같음이 좋았고 그래서 결혼도 수락했다고 하였다.
덮밥을 다 먹고 근처 카페에서 라떼를 마시던 중 선아는 얼마 안 남은 결혼식 날짜를 알려줬다.
“결혼은 돌아오는 봄! 봄에 하기로 했어. 세훈 오빠하고 처음 사귀던게 봄이었거든”
“오오오! 오선아~~ 그날 벚꽃보다 이쁘겠구만.”
“영주 그날 무슨일이 있어도 꼭 와야해 알았지?”
“당연하지! 무슨일 생겨도 다 미루고 사쿠라보다 예쁜 오선아 보러간다! 그리고 그날 뷔페도 다 죽었어!”
“킥킥. 전날에 꼭 굶고 와야하는거 알지?”
“당연하지! 이틀 전부터 굶을껀대? 언니 그때 봉인 해제 간다.”
언제 한번 선아의 남자친구를 본 적 있었다. 선아의 말처럼 정말 듬직한 사람이었다.
10년 동안 선아를 한결같이 좋아한 그 남자라면 결혼하고도 그의 모닥불이 잔잔히 계속될 것 같았다.
친구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영주였지만 어딘가 가슴 한켠이 시렸다.
이 시려움은 대체 뭘까 생각하다 영주는 그 남자가 떠올랐다.
슈크림 붕어빵을 좋아하던 그 남자.
한동안 장발만 고집해 여름철이면 덥다고 서로의 머리를 묶어주던 그 남자.
썰렁한 아재 개그를 좋아하는 그 남자. 그리고 8년 동안 자신의 옆을 지켜준 그 남자.
‘서하야 만약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도 결혼했을까?’
영주는 만약 서하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 남자와 앞으로 오지 않을 미래를 상상했다.
그 미래는 이상하게 달콤했다.
바쁜 프로젝트가 끝나고 영주 팀은 간만에 칼퇴근하였다. 1월 초 한파는 매서웠다.
따뜻한 어묵탕에 소주가 땡기는 날씨, 영주는 사내 메신저로 선아에게 플러팅을 해봤다.
‘선아 오늘 어묵탕에 소주어때.’
‘미안.... 나 결혼준비 때문에 당분간 바쁠 듯.’
결혼 준비 때문에 바쁜 선아를 두고 오늘은 그냥 혼술하기로 결정했다.
영주는 혼술할 수 있는 회사 근처 일식집에 가 오뎅탕에 소주를 마셨다.
그녀가 혼술할 때면 무선 헤드셋이 소중한 그녀의 친구가 되어준다.
음악이 있고 없고 술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집 음악은 뭔가 취향이 다르다.
그래서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애지중지하는 영주였다.
그녀의 플레이리스트에는 200여개의 노래가 있어 셔플 재생을 눌러놓고 소주 한병을 비웠다.
그러던 중 ‘처음 보는 나’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는 4년 전 그녀가 매몰차게 차버린 그 남자.
서하의 애창곡이었다.
고등학교 때 야자째고 노래방 가면 서하가 항상 불렀다.
그리고 대학 MT때 벌칙으로 걸린 술 게임에서 그가 부른 노래였다.
군대 휴가 나와 노래방 가면 항상 부르던 노래였으며, 서로의 취준생 시절 기분 전환 겸 노래방에 가 부른 노래였다. 어떻게 보면 서하와 나의 8년이란 연애 기간동안 항상 함께한 노래였다.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여서 8년이란 추억이 담긴 노래를 들으니 무언가 슬펐다.
헤어지고 그 남자의 사진과 흔적 모두를 지웠지만 이 노래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이 노래마저 지우면 서하와의 8년이란 시간이 정말 끝일 것 같은 조그만 미련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겨놨다. 앞으로 그 남자의 노랠 들을 수가 없는 사실이 슬펐다.
“이서하 이 노래만큼은 진짜 잘 불렀는데.”
왜 사람들이 밤에 술 마시면서 발라드를 듣지 말라는지 알 것 같다. 자꾸 서하가 생각났다.
서하는 잘 지낼지. 왜 헤어지고 연락 한번 하지 않았는지 밉다가도 보고 싶었다.
감정이 겨울철이면 손이 틀까 바르는 핸드크림처럼 촉촉해져 갔다.
이러다가 진짜 흑역사를 만들 것 같아 서둘러 계산하고 집으로 향했다.
술을 먹으면 신기하다. 어묵탕을 그렇게 먹었는데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1월 한파는 추웠고 따뜻한 음식이 생각났다. 그 남자와 겨울철이면 함께 먹었던 음식이 떠올랐다.
영주는 취기에 이끌려 그때 그 붕어빵 가게로 향했다. 술기운에 비틀비틀 걸으며 겨우 도착했다.
가게는 평소처럼 따뜻해 보였다. 1월 한파 따위 금방 잊게 해줄 거 같았다.
그래서 자주 오고 싶은 공간이었다.
안에서부터 조금씩 그래서 더 애타게하는 붕어빵 냄새가 영주를 유혹했다.
치즈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생쥐처럼 영주는 가게 문을 열었다.
가게 문을 열자 그녀가 좋아하는 붕어빵 냄새가 가득했다.
“어서오세요.”
젊은 여자 점원의 미소는 따뜻했다. 그 따뜻한 미소의 영주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가게 안에는 영주 말고도 먼저 붕어빵을 기다리고 있는 고등학생으로 추정되는 여학생과 남학생이 있었다.
그 둘은 이제 막 야자가 끝난 건지 조금은 지쳐 보이기도 했지만, 곧 나올 붕어빵을 기다리는 과정이 설레 보였다. 이윽고 둘이 주문한 슈크림과 팥 붕어빵이 나오자 둘은 웃으며 먹기 시작했다.
“호…호…. 하. 앗뜨거!”
“바보! 천천히 좀 먹어! 그러다 입천장 다 까진다고!”
“헤헤. 너무 맛있는 걸 어떡해.”
여학생은 배가 고팠는지 뜨거운 슈크림 붕어빵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런 여학생이 익숙한 듯 남학생은 휴지로 그녀의 입을 닦아주었다.
그 둘의 모습은 귀여웠다.
겨울철 야자를 째고 돌아오는 길, 늘 붕어빵을 사 먹던 서하와 영주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문은 늘 슈크림 2개에 팥 붕어빵 2개였다. 붕어빵을 먹을 때 만큼은 서하도 나도 무척 행복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취기가 올라서인지, 붕어빵을 봐서인지, 아니면 이 가게가 아늑해서인지 오늘따라 서하 생각이 많이 나는 영주였다.
영주는 앞의 고등학생들처럼 슈크림 2개와 팥 2개를 주문했다.
그리고 핸드폰 보는 척 조심스럽게 고등학생들을 구경했다.
저 둘은 이미 사귀고 있는걸까. 아니면 썸일까. 아니면 한 명의 짝사랑일까.
궁금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줌마의 주책이라 생각하겠지.
영주는 둘의 관계를 짐작하며, 곧 나올 붕어빵을 기다렸다. 한파에 꽁꽁 언 손을 난로에 녹이고 있었다.
주문한 붕어빵이 나오자 영주는 난로 옆에서 아까의 여학생처럼 슈크림 붕어빵을 먼저 맛봤다.
한입 베어 물자, 붕어빵 안에서 노란 빛깔의 슈크림이 터져 나왔다.
이 집은 정말이지 남는게 있는가 싶을 정도로 슈크림과 팥을 가득 넣어준다.
그래서 이 가게를 알고부터는, 다른 집 붕어빵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슈크림이 이렇게 맛있는 줄 진작 알았다면 그때 야자 째고 오는 길에 이서하 슈크림 붕어빵 뺏어 먹을 걸.”
“뭐 뿌링클도 나쁘지 않았지만. 히히.”
영주는 고등학생 시절 귀여웠던 서하와 자신을 상상하며 아까의 오뎅탕만으로는 부족했던 허기를 달랬다.
그때였다. 그 남자가 나타났다.
오늘 꿈은 예지몽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최근 보고 싶다고 눈앞에 좀 나타나라고 말해 요정님이 새해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20살 때 사귀기 시작해, 8년 동안 연애를 하고 이제는 깨끗하게 남남인 그 남자 이서하가 나타났다.
이제는 장발이 아닌 모습으로. 그리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어……? 너…. 서영주?”
최근 이서하가 보고 싶은 건 맞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을 원하지는 않았다.
취기 오른 지금이 아닌, 적어도 맨정신일 때 만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이 공간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너무 웃기지 않은가.
그리고 밖은 너무 춥고, 손은 아직 녹지 않았다. 또 붕어빵이 3개나 남았다.
그래서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그에게 인사를 했다.
“어……. 잘 지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