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우린 아직 늦지 않은걸까.

가끔은 내 생각이 날까

by 박하준

4년 전, 영주가 서하에게 이별을 고하고 뛰쳐나간 둘의 마지막 연애의 장.

그 해 무더운 여름의 장마철.


그날의 기억은 영주에게 연고를 아무리 발라도 아물지 않는 상처였다.

그래서 그녀는 서하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는 4년 전 아픔에서 자신이 이제는 괜찮아진 줄 알았다.

그래서 그 남자를 봐도 담담하고 어른스럽게 얘기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만이었고 착각이었다. 여전히 그 남자를 보면 4년 전 그날이 기억났다.

그날의 기억은 영주를 여전히 아프게 하였다.


“그토록 보고 싶던 이서하인데… 나 대체 왜…. 왜 도망친거지?”


집으로 가는 길 서하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사과 먼저 할게. 그때 일 정말 미안해. 그리고 보고 싶었어.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


영주는 서하가 아까 전 한 말을 계속 곱씹었다.

그 말은 영주가 단골이 된 붕어빵 가게처럼 따뜻했다.

그리고 떨렸다.

이 떨림은 아까의 아픔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영주는 여전히 서하를 보면 떨렸다.

그래서 서하의 그 말을 핫팩처럼 계속 품고 있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잘 준비를 한 영주.

하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의 떨림 때문이었을까.

그 떨림은 전 남친과의 우연한 재회 따윈 기다려주지 않는 화요일 출근을 앞둔 직장인을 괴롭혔다.

영주는 뒤척이며 서하가 건넨 핫팩같이 따뜻한 그 말을 떠올렸다.


“4년이 지났는데 아직 까지 날 잊지 않았다고? 이서하 진짜 순정파네.”


아직도 자신을 기억해주고 있는 서하가 고마웠고 애틋했다.

그리고 안쓰러웠다.

영주는 오랫동안 마음 속 구석에 숨겨져 있던 진심을.

4년 전 상처에 가려져 오늘 서하 앞에서 꺼낼 수 없던 진심을.

부모님 몰래 컴퓨터 하는 학생처럼 아무도 들리지 않게 꺼냈다.


“있잖아.. 나도 보고 싶었어. 서하야.”


그가 절대 들을 수 없는 진심을 중얼거리는 영주였다.

그녀의 진심은 분명 술기운은 아니었다.


“바보... 왜 아직도 나를 못잊고 있는거야.... 나 같은 사람 잊고 더 좋은사람 만나지. 왜 안어울리게 순정 남주 코스프레냐고!”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진심은 소용돌이처럼 영주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마치 노래가 싸비 부분.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미안해. 그리고 보고 싶었어. 영주야.”


서하의 말은 영주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영주를 계속 떨리게 만들었다.

그 떨림은 영주를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이게 만들었다.

그 감정은 너무 큰 소용돌이 같아서 내일 출근을 앞둔 서영주라는 직장인을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잠들지 못한 그녀는 계속 울었다.


자신을 잊지 못한 전 남자친구가 미웠고, 보고 싶었다.

그리고 때론 안쓰럽고 고마워서 울었다.


그녀의 눈물은 너무나도 서러워서 붓기가 심하지 않은 안주를 먹은 영주였지만 내일 일어나면 반드시 눈이 부을 것 같았다.


분명 행복했던 기억들이 많았던 우리였다.

서하는 항상 따뜻한 사람이었다.

겨울철 추위에 약한 영주를 위해 항상 핫팩을 주머니에 2개씩 넣고 다녔다.

우리의 연애가 횟수로 3년에 10개월에 접어들던 겨울이었다.

서하는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카페 마감 알바를 끝내고 오는 나를 항상 기다렸다.

나의 퇴근길은 서하가 있었기에 매서운 겨울에도 항상 따뜻했다.


“서하야... 나 너무 추워.. 으으.. 또 겨울이라니..”

“으이구 바보. 손 줘봐.”


몇 분전쯤 핫팩을 깠는지는 알 수 없다.

30분전쯤 개봉했을까. 아니면 한 시간?

서하가 건넨 핫팩은 따끈따끈했다.


“히히. 따뜻해!! 역시 내 남친 최고!!!”

“남친!! 남친도 손 시렵지?”

“난 추위에 강해서 괜찮아. 그리고 내꺼도 이미 하나 있거든?”

“에이 그럼 반대쪽 손 시렵겠네! 손 줘봐 히히.”


서하는 영주가 언제 올까 1시간 전부터 버스정류장을 맴돌아 차가운 내 손을 꼬옥 잡아줬다.

내가 준 핫팩을 우리 손과 손 사이에 끼운 채. 분명 핫팩이 따뜻했을텐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날 내 손을 잡아 준 따뜻한 영주의 손이었다.

그 손은 어찌나 따뜻했던지 겨울철이면 생각났고 겨울철이면 놓치지 않고 항상 잡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그 손을 이젠 잡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단지 그날의 따뜻한 영주의 손 감촉만 기억날 뿐이다. 슬퍼하는 단골 손님을 위해 붕어빵을 가득 싸서 주신 내가 좋아하는 공간의 사장님 덕분에 나는 나만의 붕마카세를 즐기고 있다.


“다음에 영주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되지. 단발머리 잘 어울린다? 요새 일은 어때?”

오늘 영주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에 대한 자신만의 오답 노트를 쓰고 있는 서하였다.


“단발머리도 이쁘지만 역시 영주는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데.”


서하는 4년 만에 재회한, 지금은 단발머리가 된 그녀를 생각하며 4년 전 그때의 영주를 생각했다.

서하의 추억 속엔 누구보다 청순했던 그녀가 있었다.


“자기야 나 단발하면 어떨거 같아?”

“단발? 단발하면 귀여울거 같은데.”

“단발할까?”

“킥킥. 난 삭발만 안 하면 다 좋아!”

“뭐어! 치. 나 확 삭발하고 온다!”

“아 서영주씨 잠시만요! 영주야 안돼!”


둘이 지내기엔 조그맣던 우리의 보금자리.

그 조그맣던 보금자리는 영주와 둘이어서 재밌었고, 둘이어서 따뜻했다.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영주와 히히닥 거리던 그때의 우리가.

그때의 자신이 서하는 무척 그리웠다.


“아. 서영주 보고 싶다.”


서하는 집에서는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한 봉지 가득 있던 붕어빵은 어느덧 3조각 남았다.

4캔의 1만2천원이라 산 맥주는 1캔만이 남았다.

3캔의 맥주는 서하를 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음냐... 서영주. 다음에는 안 놓칠거야. 꼭.”


화요일.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 해야하는 직장인이 있다.

전날 전 남자친구와 재회해 밤잠을 설친 그녀였지만.

아침 알람은 어서 출근하라며 그녀를 깨웠다.

자신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이 울리는 아침 알람이 영주는 미웠다.


출근 후 영주는 정신없는 업무에 오전을 보냈다.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이 오자 영주는 선아와 서둘러 왕만두 집으로 도망쳤다.


김치만두에 왕만두.

하지만 만두만으로는 오전 업무를 멋지게 끝낸 직장인 둘에게 섭섭하지 않은가.

그 섭섭함을 달래기 위해 칼국수를 시켰다.


추운 겨울 메뉴 선정까지 완벽히 끝낸 영주는 어제 있었던 일을 선아에게 말해주었다.

영주의 전 남친 소식에 김치만두를 간장에 찍고 있던 선아는 만두를 놓쳐버렸다.


“뭐어? 진짜? 전남친이랑 붕어빵집에서 재회했다고?”

“응....”

“와 대박이네. 전남자친구가 뭐래?”

“잘지냈냐고. 전에는 미안했다고. 그리고 4년동안 보고싶었다고.”

영주는 그녀의 화장품 파우치보다 큰 왕 고기만두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보고 싶었다고? 완전 드라마 한편이네. 영주 넌 어땠어?”


어제의 생생했던 일을 상상하는 영주였다.

그리고 서하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시간은 오후 12시 20분.

분명 감성에 젖을 시간은 다 지났다.


근데 이상하게도 서하의 그 말이 영주를 계속 떨리게 만들었다. 이 떨림은 그 남자를 다시 만나야지 멈출 것 같았다.


“떨렸어. 엄청. 근데 나 도망쳤어. 4년 전 일이 떠올라서.”

“떨렸다고? 뭐? 도망쳤다고?? 으이구 우리 영주 어제 밤에 맘고생 했겠네.”

“응... 잠이 안오더라...... 그래서 거의 밤 샜어.”

영주의 말에 선아는 자신이 먹으려던 하나 남은 고기만두를 영주에게 건네주었다.


“으이구 지지배.”

“선아야 나한테 이서하는 그런 존재야. 내 앞에 나타나면 날 언제나 무장해제 시키는.”

“선아야 내가 도망쳤던거 사과 해야겠지……?. 분명 상처받았을 거야 이서하. 보기보다 되게 여리고 바보에 울보거든.”

“답은 영주 너가 이미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선아는 간장 범벅 된 김치만두를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간장의 짠맛을 잠시 뒤로하고 맘고생 중인 자신의 절친이자 입사 동기인 영주를 위해 조언했다.


“맘 가는 대로 해야 후회도 미련도 없다 지지배.”


선아의 말을 곱씹으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린 영주였다.


나는 아직 이서하가 좋다.

그리고 나는 어제 서하에게 상처를 줬다.

그래서 서하에게 사과를 할 것이다.


퇴근 후 붕어빵 가게에 들르기로 맘먹은 영주였다.

왠지 그 곳에 가면, 그 아늑하고 따뜻한 그 공간에 가면 서하가 있을거 같았다.

그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하지.

잘 지냈어? 어제는 미안해?

저녁은 먹었어? 붕어빵 좀 같이 먹을래?


서하에게 할 말을 정하며 붕어빵 냄새가 나는,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 길을 걸어갔다.

가게 문을 열기 전 항상 설레임 가득했던 영주였지만, 어쩐지 오늘은 조금 떨렸다.

중요한 면접을 앞둔 취준생처럼 긴장되었다.

긴장되자 아까 자신보다 먼저 유부녀가 될 선아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맘 가는 대로 해야 후회도 없는 거야!”


나름의 비장의 각오를 마친 영주는 가게 문을 열었다.

가게 문을 열자 빨간색 목도리가 잘 어울리는 할아버지하고 여자 점원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제 영주를 떨리게 한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서오세요. 오늘은 무얼로 드릴까요?”


점원의 따뜻한 말과 미소에 영주는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아쉬움 반 다행 반으로 팥 붕어빵 2개를 주문했다.


‘그래 나는 오늘 단골 가게에 붕어빵을 먹으로 온거야.’

‘절대 이서하를 만나러 온게 아니야.’


영주는 그 남자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이 공간에 당당히 단골손님의 자격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 같이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이었지만, 오늘따라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목도리가 잘 어울리는 노신사님. 슈크림 5개 나왔습니다. 한 개는 서비스입니다.”

자신을 부르는 점원의 친절한 목소리에 노신사는 빨간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고마워요. 손주가 이 집 슈크림 붕어빵을 진짜 좋아해요.”


손에 굳은살이 가득한 그 노신사의 손.

노신사는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손주를 생각하며 흡족히 웃었다.

그리고 점원에게 인사하며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슈크림 붕어빵을 좋아하는 손주가 있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주가 주문한 팥 붕어빵이 나왔다.

영주는 붕어빵을 받고, 익숙하게 자신만의 자리에 앉았다.

거기서 영주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난로와 함께 붕어빵을 즐겼다.

그리고 혹시나 오지 않을까 하는 그 남자를 기다렸다.

정말 오랜만에 그 남자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4년 전에는 일상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