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끔은 그때가 떠올라.

행복했던 그날. 돌아가고 싶은 그때.

by 박하준

처음에 서하를 기다렸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아마 서하가 첫 취업 했을 때였나.


서하는 나와 달리 취준생 시절을 빨리 보냈다.

우리가 사귄지 6년 2개월차 되던 해.

당당하게 대기업에 입사했다.


서하는 취업 문자를 받고 나를 안으며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하였다.

첫 퇴근 후 서하는 내가 좋아하는 뿌링클에 팥 붕어빵을 잔뜩 사왔다.


“자기야!!!! 서방님 퇴근했어요 히히.”

“뭐어 서방님??? 이서하 벌써 내 서방님이야? 히히.”

“이제 결혼만 남았으니 서방님이지 히히.”

“킥킥. 자갸 근데 어디서 치킨냄새 나는거 같은데. 옆집인가.”

“짠! 뿌링클하고 붕어빵”

“와.... 자기 아니 서방님 사랑해요.”


지금 생각해보니 서하를 기다리는게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기다리는게 즐거웠던 그날을 회상하며 영주는 자신의 앞에 먹기 좋게 놓인 붕어빵들을 사냥해 주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즐거웠던 기다림은 영주를 외롭게 만들었다.


우리가 사귄지 횟수로 6년 8개월차 되던 날이었다.


평소 바빠 요리를 잘하지 않는 영주였지만 그날은 앞치마를 하고 서하가 날마다 먹고 싶다고 노래 부른 된장찌개를 끓였다.


매일 야근에 고생하던 서하를 위해 엄마에게 레시피까지 전수 받은 그녀였다. 영주의 서툰 칼솜씨에 단호박과 양파는 삐뚤삐뚤했으나 서하라면 오히려 큼지막해 먹음직스럽다고 할 것 같았다.


“이서하가 이따 이걸 보면 어떤 반응 일려나 킥킥.”


된장찌개를 본 서하의 여러 가지 반응을 생각하자 행복한 영주였다.

어서 빨리 서하가 와서 자길 위해 된장찌개를 끓인 자신을 꼬옥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하가 퇴근할 시간이 벌써 지났는데도 서하는 오지 않았다.

따끈따끈한 된장찌개는 서하를 기다리며 조금씩 식어갔다.


“서하 올 때가 지났는데. 오늘은 좀 늦네.”


오지 않는 서하를 기다리며 기다림이 조금씩 지루함으로 바뀌던 순간.

서하에게 메시지가 왔다.


‘자기야 나 거래처 일이 늦게 끝났다. 팀장님이 오늘 고생했다고 다 같이 회식하자고 하셔서 오늘 저녁은 자기 혼자 먹고 있어요. 미안해요.’


최근 바쁜 서하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영주였지만, 그날은 서하의 메시지가 조금은 서운했다.


“일이 늦게 끝날거 같으면 늦게 끝난다. 회식하면 회식한다 미리미리 좀 말해줄 수는 없는 건가 치.”


서하를 위해 끓인 된장찌개를 혼자 먹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꼬르륵 나던 영주의 배였지만 이상하게 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외로웠다.


아담한 둘만의 식탁이 오늘따라 넓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집안일을 다 끝내고 서하를 기다리다 새벽 2시쯤 잠든 영주였다.

그리고 30분쯤 지났을까.

현관 비밀번호가 눌렸다.

집에 가기 싫단 팀장님을 겨우 집에 보내고 힘이 다 빠진 서하였다.


오늘따라 유독 긴 하루였다.

그래도 밤에 영주를 껴안고 잘 수 있단 생각만으로 회식을 버틴 서하였다.


그때 부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냄새가 났다.

영주에게 먹고 싶다고 노래 부른 된장찌개였다.

된장찌개를 보자 영주를 너무 안고 싶었다.

안방에 들어가자 사랑스러운 그녀가 보였다.


오늘 서하를 위해 된장찌개를 끓인 그녀.

회식 중인 서하를 기다리다 잠든 그녀.

서하는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하아암…. 서하…? 이서하! 왤케 늦게 왔어! 치.”

영주를 더 꼬옥 안았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체온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켁켁. 숨 막혀. 이것 좀 놔봐! 켁.”

“영주야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외롭게도 서운하게도 안 할게.”

“켁켁. 알겠어 알겠어.”


오늘 자신을 서운하게 한 서하였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말이 따뜻했고 그 남자의 품이 따뜻했다.


그래서 지금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티라미수 케이크 같은 서하의 말을 들으며 그의 품에 안겨있고 싶었다.


“영주야 있잖아. 그거 알아? 내가 너 진짜 진짜 사랑한다? 사랑해. 서영주.”

“으이구 내가 설마 그거 모를까 봐? 누구보다 잘 알지 히히. 나도 사랑해 서하야.”


자신이 좋아하는 팥 붕어빵을 다 먹을 때쯤 영주의 회상이 끝났다.

그 남자가 보고 싶었다.

그때 자신을 꼬옥 안고 사랑한다고 말한 이서하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때 여자 점원의 말이 들렸다.


“손님 혹시 기다리시는 분 있으신가요?”

“네?????? 아니요!!!!!”

“아까부터 계속 문 쪽만 보시고 있어서요. 혹시 기다리시는 분이 있는 줄 알았어요.”

“아…. 하하 그게. 하하. 사실은……. 맞아요.”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람.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멀어진 사람.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분도 이곳에 자주 오나 보네요.”


영주는 그녀의 별거 아니지만 사소한 배려가 좋았다.

그 배려는 이 공간을 더 따뜻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 따뜻한 공간의 주인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팥 붕어빵을 잘 굽는 그녀라면 왠지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될 거 같았다.


“아 그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왠지 이 공간이라면 그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사실 저번에 여기서 만났거든요, 근데 도망쳤어요. 아직 자신이 없어서. 그 남자가 아니라 그때 제 상처를.”


점원은 영주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자신이 할 일을 하면서 그녀가 편안히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지금은 생각이 바뀌신 건가요?”


“아…. 네. 사실 뒤늦게 깨달았어요. 나도 아픈 만큼 그 사람도 아팠겠구나. 나는 너무 내 상처만 생각했구나.”

“그리고 생각보다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좋아했구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구나. 사실 저 여기서 처음 붕어빵 먹었을 때 계속 그 남자가 떠올랐어요.”


“그 남자와의 좋았던 기억도, 아팠던 기억도 자꾸 떠올랐어요. 근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어요. 오히려 좋았어요.”

“그래서 사장님의 붕어빵엔 무언가 다른 게 들어있나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영주는 아프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신기한 붕어빵이 신기했다.


“솔직히 마법의 재료 같은 거 저희 몰래 넣으시죠. 사장님.”

“그 마법의 재료가 있었으면 전 이미 정부에 잡혀갔을걸요? 아니면 몰래 밀 거래를 했을지도 모르죠. 비싼 돈을 받으면서.”

점원의 썰렁한 농담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그리고 제 상처를 딛고 일어나고 싶어요! 상처 때문에 그 남자를 포기하기엔 그 남자가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그 남자를 만나려고요. 만나서 4년 동안 하지 못했던, 4년이 걸렸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점원은 영주의 당당함에 피식 미소를 짓었다.

그리고 영주를 보고 있으면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일제강점기.

자신의 운명에 맞서 사랑했던 이를 지키고자 했던 자신과 영주는 닮아있었다.


그녀의 용기를 응원하며 그녀에게 붕어빵 한 봉지를 건넸다.


“이건 오늘 손님의 사연에 대한 제 마음입니다. 손님의 용기를 응원할게요.”

“엇? 이게 뭐에요!!!!!!! 사랑합니다 사장님!!!!!”


영주는 집에 돌아오는 길, 다음번에는 그 남자.

이서하를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때론 티라미수 케이크처럼 달콤하고, 때론 핫팩처럼 따뜻한 그 남자의 말에 영주는 항상 큰 힘을 얻었다.

그래서 이번엔 자신이 그런 말을 그 남자에게 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