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나둘씩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

완전히 당해버렸다

by 박하준

지훈이는 요새 연애 중이다. 상대는 회사 후배였다. 사수와 부사수 관계로 만난 둘.

시간은 지훈이의 여자친구가 지훈이네 부서에 왔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훈이의 여자친구는 입사한지 얼마 안되어 모든 것이 서툴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잘부탁드립니다!”

“그래. 나도 잘부탁해.”

“뭐든지 맡겨주세요!!!”

입사한지 얼마안된 신입의 패기일까, 자신감은 항상 만땅이던 세아였다.


“정말이지? 앞으로 어려운일 있으면 다 너한테 맡긴다.”

“아앗…. 넵…. 맡겨주세요!”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됐다. 나 그렇게 악덕 사수 아니다.”

“일단 오늘 쓸 보고서부터 같이 볼까?”

“네넵!”


지훈이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날개짓이 서툰 참새를 떠올렸다.

날개짓이 익숙해질 때까지 세세하게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업무를 알려주었다.

서투름 투성이었던 그녀는 지훈이의 도움을 받아 점차 제약회사의 사원으로써 능숙해져 갔다.


“사수! 이따 미팅에서 닥터들 설득할 보고서인데 괜찮은지 한번 봐주세요!”

세아가 쓴 보고서를 한 장, 두 장 지훈은 유심히 보았다. 왠지 긴장되는 그녀였다.


“흠…. 접근은 되게 좋은데…. 이 부분은 좀 더 쉽게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약의 안정성은 당연히 강조해야 하니깐……. 이렇게.”

길을 헤메던 참새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역시 사수에요! 감 잡았어요! 다른 제약회사 약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라는 거죠?”

“바로 그거지. 역시 가르칠 맛 나는 부사수라니깐.”


야근이 일상이던 지훈의 회사.

참새는 날개짓이 서툴렀을 때부터 익숙해질때까지 항상 지훈 옆에서 꼬박 야근했다.

밤늦게까지 야근하던 둘에게 야식은 하루의 유일한 낙이였다.


“사수! 오늘은 떡볶이 어때요?”

“세아씨 매콤한거 땡기는구나? 그러면 떡볶이 받고, 튀김도 콜?”

“완전 콜이요 사수!”

떡볶이와 튀김이란 말에 세하는 숨길 수 없는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세아의 웃음을 보자 문득 누군가의 웃음이 떠올랐다. 지훈을 무장해제 시키던 그 웃음.

언젠가 한번쯤은 보고 싶을 그 웃음. 이제는 다신 볼 수 없는 지훈의 추억이 된 그 웃음.

예지랑 헤어지고 다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지 못할 것 같았다.


누굴 만나든 예지만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서하가 이별의 약은 시간이란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부정했다.

분명 지금도 그럴 것이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선배 김말이는 떡볶이 국물에 먹어야 더 맛있는거 아시죠?”

그녀는 이미 맛있는 김말이를 더 먹음직스럽게 만들었다.


“오 세아씨. 먹을 줄 아네?”

“헤헤. 당연하죠!”

먹음직스러운 김말이를 크게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그녀의 빵빵한 볼이 더 빵빵해졌다.


“아! 사수는 어떤 튀김 제일 좋아해요?”

“음…. 난 야채 튀김.”

“야채튀김 식감이 되게 좋잖아요!”

“맞아. 거기에 떡볶이 국물에 푹 찍어 먹으면 그날 스트레스는 싹 풀려.”

“킥킥. 선배 약간 고독한 미식가 부장 아저씨 같아요.”

“에이 그분은 너무 잘 드시잖아. 난 그 정도로 맛있게 먹진 못해. 아. 같은 아저씨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내 말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세아는 빵빵 터졌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어라. 떡볶이가 매워서 그런가? 그렇게 맵지는 않은데.


우리는 하루 유일한 낙을 마치고, 다시 업무에 돌입했다.


“선배 이따 야근 끝나고 디저트 어때요?”

“디저트? 지금 연 곳이 없을 텐데….”

“선배도 참. 겨울이잖아요. 겨울!”

다른 의미로 참새의 볼이 빵빵해졌다.

“겨울?”

“겨울 하면 뭐부터 떠올라요!”

“음 …. 붕어빵…?”

“역시 제 사수! 붕어빵 먹으러 가요. 우리!”


그녀의 말에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좀 더 정확히 설레였다.

이 나이쯤 되면 설레임이란 감정은 무뎌진다. 대학교 때처럼 다시 설레임을 못 느낄 줄 알았다.

하지만 설레인다. 두근거린다. 내가 이상하다. 오늘따라 평소와 달리 퇴근길이 기대된다.


시간은 흘러, 발렌타인데이가 왔다. 세하는 우리 팀에 완전히 적응됐다.

이제 더 이상 참새의 날개짓은 서툴지 않다. 참새가 선물을 들고왔다.


“이건 부장님꺼! 이건 과장님꺼! 이건 대리님…….”

그녀는 팀원들에게 하나하나 초콜렛을 돌렸다. 초콜렛은 파란색 리본과 예쁜 포장지로 포장되어 있었다.


“사수! 여기 사수 꺼에요. 항상 감사했어요.”

“이제 출근 안하려고?”

내 농담에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에이! 아직 값아야 할 학자금이 한참 남았어요.”

“작별인사인줄 알았잖아.”

“벌써 작별인사 하면 안되죠. 이래뵈도 꾸준한 선배 야식 메이트인데.”


얼마 만에 받은 초콜렛인가.

예지랑 헤어지고, 나에게 발렌타인데이는 그냥 편의점에 초콜렛이 많이 진열된 날이었다.

얼릉 빨간 리본을 풀어봐야겠다.


어? 빨간 리본? 왜 내 껏만? 서둘러 다른 팀원들 초콜렛을 다시 확인했다.

다들 파란색 리본이다. 내가 세아씨의 첫 사수라서 특별한 걸까?


빨간색 리본을 다시 보고 옆자리 세하씨를 봤다.

열심히 일에 집중한 그녀. 귀여운 그녀.

어? 요즘 내가 왜 이러지? 요즘 내가 이상하다.


“세아씨 초콜렛 잘먹을 게 고마워.”

“에이 뭘요 사수! 하나도 남기면 안되요!”

세아는 웃었다. 그녀의 말에 나도 웃었다.

가만 보면 웃음이 참 많은 것 같다. 저 나이 땐 다 웃음이 많은 건가?


“당연하지. 빨간색 리본 이쁘다. 포장하느라 고생했을텐데.”

포장지를 푸느라 집중하고 있을 때 사건은 일어났다.

나는 단단히 방심했었다. 세아는 조심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사수 궁금한게 하나 있어요.”

“어 말해. 뭔데 세아씨?”

조금더 조심스럽게 내 어깨 근처까지 다가와 속삭였다. 읊조렸다는 표현이 맞을까?


“오늘은 여자가 남자한테 고백하는 날이잖아요.”


당했다. 완전 K.O 완패였다.

그녀는 직구를 강하게 던지고,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웃으며 자신의 컴퓨터로 향했다.

두근. 그녀의 직구에 나는 속소무책으로 쓰러졌고, 정신을 차릴 때쯤 내 심장은 이미 고장 나 있었다.


그 이후는 속전속결이었다. 퇴근 후 정식으로 그녀는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나는 고장 난 심장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 인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내 들켰다.


“푸흡. 사수 심장 고장나신거 아니죠?”

“어어? 아니 그게…. 오랜만에….”

내 변명이 끝나지 않을 때쯤 그녀의 입술이 다가왔다. 이것이 요즘MZ인가?


그렇게 사수와 부사수에서 나와 세아씨는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란 호칭으로 연인이 되었다.

아직도 세아는 그날 고장 난 심장 소리를 가지고 놀린다. 하지만 이젠 아무리 놀려도 상관없다.

지금 내 손을 잡고 있는 참새라는 별명의 그녀. 그녀는 이제 내 여자친구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