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에필로그. 여자 점원의 이야기.

그 첫번째 이야기

by 박하준

나는 죽지 않는다. 빌어먹을. 이제는 이 삶이 지긋지긋하다.

소중한 인연을 만나도 그 인연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인간의 수명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500년 동안 아무 인연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겼다.

망했다. 이게 다 그 멍청한 인간 남자 때문이다. 그 남자의 직업은 국화빵 장수였다.

그 남자와 어쩌다 만나게 되었을까.


1930년 일제강점기. 모두가 바쁜 경성의 아침.

그 국화빵 장수는 남들보다 1시간은 일찍 출근해서, 1시간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낡은 천막에서 국화빵을 팔았는데, 그곳에선 항상 달콤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천막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천막에 꼭 들리게 하였다. 그래서 천막엔 항상 사람들이 몰렸다.


“10원어치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보슈. 팥 좀 듬뿍 넣어주시오!”

“헤헤. 어머님 배터지게 먹을 수 있게 듬뿍 넣어드릴게요.”


사람들은 그 낡은 천막의 따뜻한 온기를 좋아했고, 그 국화빵 장수의 인심을 좋아했다.

그래서 허름한 낡은 천막에 자꾸 방문하게 되었다.


출근길에 그곳을 들리면 장소의 온기 때문인지, 그 남자의 정 때문인지 따뜻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퇴근길에 그곳을 들리면 지친 심신에 조그마한 위로를 받았다.

서울 사람들에게 국화빵 장수의 낡은 천막은 단순히 국화빵을 사먹는 곳 이상의 장소였다.


“아저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머님 오늘도 장사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으이구.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 애들아. 아저씨가 국화빵 2개 더 넣었다.”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했다.

사람들이 이 천막에서 조금이라도 희망과 위로를 얻고 간다면 그는 그걸로 좋았다. 그리고 희망을 얻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언젠간 다가올 조국의 독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에게 국화빵은 현실에 지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조그마한 행복과 희망이었다.


국화빵 반죽이 거의 다 떨어져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여자가 천막을 찾았다.

그 여자는 어디서 굴렀는지 아니면 다쳤는지 다리를 쩔뚝이고 있었다.

그리고 팔에는 총상을 당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몰골은 몇일을 굶었는지 볼이 볼품없이 앙상해져 있었다.

붕어빵 장수가 이 여자는 대체 누굴까 생각할 때 쯤. 그 수상한 여자가 말을 먼저 꺼냈다.


“헉헉…. 잠시만 숨겨주세요.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숨겨달라고요? 누구한테 쫓기고 있나요?”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먼저 신세 좀 질게요.”

“아니 이 처자가…!”


그녀는 천막 안쪽 반죽이 있는 곳에 숨었다. 얼마 뒤 일본 순사 3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서툰 조선말로 절뚝이는 여자를 본 적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 여자가 반대편으로 뛰어갔다고 말했다.

순사 3명은 알겠다고 하고 반대편 방향으로 사라졌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여자가 숨은 쪽을 보았다.


“이봐요. 순사들 다 갔어요! 이제 그만 숨고 나와도 돼요.”

“…….”


여자는 말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여자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몇일동안 잠을 못 잤는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채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연민이 갔다.


딱 봐도 갈 곳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그녀를 푹 재우고 푹 먹여주고 싶었다.

순사들이 눈치채고 다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하곤, 곤히 잠든 그녀를 업었다.

사람이라 하기에는 정말 가벼웠다. 국화빵 장수는 양손에 짐을 챙기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국화빵 장수는 그녀를 자신의 집에 데려온 후 정성스레 간호했다.

평소 연민이 남들보다 한 국자 반 정도 더 많은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연민이 아니었다.

그녀가 궁금했다. 대체 그녀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평소 여름에는 덥게 겨울에는 춥게 사는 것이 익숙한 그였지만, 사연이 있어 보이는 손님을 위해 간만에 장작을 베었다. 장작을 얼마나 넣었을까. 그의 온돌방은 오늘 그가 판 국화빵처럼 금새 따뜻해졌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닭도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 그녀는 눈을 떴다.

따뜻한 온돌바닥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 오랜만에 푹 자서인지 몸이 가벼웠다.

눈을 뜨자 낯선 풍경에 그녀는 당황했다.


“여…여긴 어디지…?”


그녀는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봤다. 분명 일본 순사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순사들의 추격을 따돌리려 국화빵 냄새가 가득한 천막에 숨었다. 그녀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분명… 천막에 숨었던거 같은데….”


그때였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겉옷에 숨겨둔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숨죽이고 있었다.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그녀는 침을 삼켰다.

그녀가 숨죽이며 침을 2번째 삼켰을 때쯤 방문이 열렸다.


“저기… 몸은 괜…… .”


그녀는 날쌔게 남자에게 달려가 그의 목에 칼을 겨눴다.

국화빵 장수는 당황하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살… 살려주세요!”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기…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 같아 제가 업고 데려왔습니다. 팔에 상처도 있었고….”

“그냥 외면할 수는 없었어요. 우리, 같은 조선 사람이잖아요.”


그녀는 남자를 겨누던 칼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제야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그쪽을 한번 더 데려오면 제 간이 멀쩡하지 않겠어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근데 제가 아직 할 일이 남아서……. 그럼 이만.”


그녀는 자신이 오늘 했어야하는 일이 떠올라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런 그녀를 국화빵 장수는 잡았다.

그녀의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해 웬만한 억세풀보다 더 거칠거렸다.


“잠시만요. 오늘 하루만 있다가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잖아요.”


국화빵 장수는 진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차가운 시베리아 벌판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봄날의 햇살 같은 따뜻함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괜찮아요. 아직 할 일이 남아서….”


그녀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며 겉옷을 챙겨 밖으로 향했다.

국화빵 장수는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혹여나 그녀가 길을 잃을까 봐 마을 지도를 건네주었다.

그때였다. 그녀가 웃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잠깐이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봄날의 햇살이 보였다.

국화빵 장수는 무언가 직감했다.

오늘 이 여인과 또 만날 것 같았다.


국화빵 장수는 봄이 되어, 서울에 벚꽃이 핀다면 그 벚꽃 꽃말을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이 벚꽃처럼 당신은 아름답다는 마음을 담아서.


국화빵 장수는 그녀와의 다음을 기약하며 잠에 들었다.

언제 또 그녀와 만날 수 있을까.

다음에는 꼭 그녀의 사연을 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