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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들만의 세상

꽃게탕 위의 독재자들

by 김하루


배는 남산만큼 불러 있었고, 조금 있으면 우리 아기를 만날 준비를 해야 했다.

배냇저고리와 겉싸개, 신생아 모자, 손싸개, 발싸개, 가제 손수건을 설레면서도 불안한 마음으로 큰 가방에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시어머니였다.

나는 다급하게 집안을 정리하며 어머니를 맞았다.


“지연아, 애기 수술 날짜 잡자. 내가 용한 사주 잘 보는 데서 날짜하고 시간 받아왔다. 이거 봐봐.”


나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흰 봉투를 받아 종이를 꺼내 보았다.


12월 5일 월요일 오전 8시 10분


“어머니, 병원 문을 아홉 시에 여는데 어떻게 그 시간에 맞춰요?”


“의사 선생님한테 얘기해.”


... 아, 네.”


어머니의 눈빛은 이상할 만큼 들떠 있었고, 나는 그 종이를 조심스레 가방 안에 넣었다.


“너 복이 있대더라. 아범이랑 합방은 하고 있지? 손이라도 잡고 자야 아범이 잘 풀린대.

니 운을 받아서 사업이 잘된다네, 근데 우리 집에 시집보내고 친정이 힘들어졌나 보다 얘, 운을 시집보냈으니, 어쩌냐?”


혀끝을 차며 안쓰럽다는 눈빛을 건네는 어머니가 왠지 섭섭했다.


어머니는 가방을 뒤적이다가 빨간 부적을 꺼내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남편의 베개 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이거 아범 잘되라고 넣는 부적이야.”


미소 짓는 어머니의 얼굴 앞에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된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도 없었고, 아들을 향한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식사하셨어요?”


“얘, 대충 차려라. 뭐가 있는지 한번 볼까?”


어머니는 커다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머, 얘 잘 먹고 사네? 명란젓도 있고… 이거 네가 찐 거니?”


“아니요, 엄마가 쪄서 주셨어요.”


어머니는 냉장고 안 음식을 죄다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냉동실에서 꽃게를 꺼내 들며 말했다.


“간단히 꽃게탕 해라.”


나는 무와 꽃게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뒤에서 또 한마디가 들렸다.


“지연아, 난 냉동밥 못 먹어. 새 밥 해.”


꽃게를 씻는데, 아직 녹지 않은 등딱지가 유난히 단단했다.

싱크대에 찬물이 쏟아지고, 무를 써는 칼끝이 도마를 박차듯 ‘탁, 탁’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내 속도 같이 울렸다.


‘전화도 없이 급습해 버리시고... 진짜 집에 나 없었으면 어쩔뻔했어?’


아침밥과 저녁은 꼭 차려서 먹여야 한다는, 결혼 전 시어머니의 명령 같은 약속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허리를 부여잡고 겨우 밥을 차리는 나 자신이 힘들게 느껴졌다.


끓는 냄비 위로 거품이 올라오자 나는 국자를 집어 거품을 걷어냈다.


“된장은 한 숟갈만. 다진 마늘 넣고 칼칼하게 고춧가루 팍팍 넣고, 그게 제일 맛있더라.”


‘네 ...’


입 안에서만 중얼거리고, 대신 불을 조금 더 세게 올리자, 거품이 넘치며 냄비 주변으로 국물이 흘렀다.

키친타월로 흘러넘친 국물을 박박 닦으면서 꽃게탕에 하소연했다.


‘너만 끓냐? 내가 더 끓어. 진짜 화병 나서 죽겠어, 독재주의자.’


속으로 얄미운 어머니 욕을 하며 꽃게탕을 완성했다.

김이 자욱한 부엌 안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국자를 저어 국그릇에 담고 있는데,

문이 덜컥 열렸다.




현관 쪽에서 낯익은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시어머니는 반가운 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어머, 아범 왔네? 일찍 왔구나!”


남편은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뭐야, 꽃게탕?”


“응, 어머니 오셔서 끓였어.”


나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국자를 저었다.

남편이 오자, 어머니를 욕한 게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국물 위로 고춧가루가 퍼지며 붉게 번졌다. 꼭 내 얼굴처럼.


“아범아, 내가 말한 거 있잖아. 지연이 애기 수술 날짜, 용한 데서 잡았어.

12월 5일 오전 8시 10분! 아주 금상첨화래.”


남편은 휴대폰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알아서 하세요.”


그 말 한마디에 시어머니 얼굴이 활짝 폈다.


나는 열심히 반찬과 국을 나르는데,

둘은 엉덩이가 식탁에 붙은 듯 물컵 하나 거들지 않았다.


“밥은 새로 했지?”


“네... ”


남편이 수저를 들자, 시어머니가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며

명란젓찜을 남편 쪽으로 밀어놓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부엌을 채웠고,

나는 그 사이에서 뒷모습으로만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꽃게탕을 그릇에 담는데 실수로 손이 데었다.

앗, 뜨거워...”

찬 수돗물에 손을 얼른 식혔다.


그때 남편이 무심히 말했다.

“국물 좀 싱겁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고, 어머니가 뒤를 이어 말했다.

“너네 누나 밥 먹었나? 전화해. 애들이랑 와서 같이 꽃게탕 먹자 해봐.”

아범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엄마가 해.”


순간, 또 먹자 파티를 해야 하나 싶어 속이 울컥했다.

내 의견은 단 한 번도 묻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서운했다.

꽃게 껍질을 와그작 깨물며 씹는 입모양이 유난히 얄미워 보였다.


‘내 의견 좀 물어보면 어때요?’

그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다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나는 억지로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그 밥알이 목에 걸리는 순간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결혼이라면, 나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 #싱글맘 #엄마의이야기 #시댁문제 #시집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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